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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서율은 멍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지하 1층에 멈춰 있었다. 그때 한 실습생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한세린 님 전시회 보러 오신 거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제야 한서율은 자신이 층수를 누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실습생의 뒤를 따랐다. “이번 전시는 윤재헌 대표님이 전액 후원하셨어요. 다음 달에는 전국 투어 전시도 예정되어 있답니다.” 그 말에 그녀의 걸음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시선이 한 그림 앞에서 멈췄다. 그건 한 남자의 등 뒤를 그린 작품이었다. 조명 아래 드러난 단단한 근육 선이 선명했고, 허리 아래쪽의 흉터가 유독 눈에 띄었다. 과거, 한서율은 그 흉터를 수없이 어루만졌었다. 그래서 그림 속 인물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그림의 하단에는 날짜와 함께 문구가 작게 적혀 있었다. ‘6월 20일.’ 주방의 따뜻한 조명이 윤재헌 등을 감쌌다. 그날은 한서율이 감금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가 단식으로 항의하다가 위경련으로 쓰러진 시각, 윤재헌은 한세린을 위해 죽을 끓였다. ‘7월 1일.’ 그의 섬세한 손이 자수를 놓은 레이스 잠옷을 정리하고 있다. 손가락에는 반지가 은은히 빛났다. 그날은, 한서율이 감금된 지 열셋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절망 끝에서 칼날로 손목을 그었다. 피가 흥건히 번진 침대 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롭게 버티던 그 시각... 윤재헌은 한세린의 옷가지를 정리했다. ‘7월 15일’ 윤재헌이 우산을 들고 가로수길을 걷고 있었다. 그림 한쪽에는 누군가와 맞잡은 손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날은, 한서율이 감금된 지 스물여덟째 되는 날이었다. 한태성은 쇠사슬로 딸을 침대에 묶으며 협박했고 고열에 시달리던 그녀는 식은땀에 젖은 이불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각, 윤재헌은 한세린의 손을 잡고 아침 햇살 아래를 거닐었다. 한서율의 시선이 그림 위를 천천히 훑었다. 한 장, 또 한 장... 모든 장면이 칼날처럼 심장에 박혔다. 어둡고 길었던 그 한 달, 윤재헌은 한서율을 위해 싸운 게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한세린의 곁에 있었다. 한태성 앞에서 찻잔을 내던지고 세상에 자신의 아내는 한서율뿐이라 외쳤던 건 모두 세상을 속이기 위한 연극이었다. 한서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 며칠 후, 한서율은 병원을 찾아 일주일 뒤 낙태 수술을 예약했다. 그리고 어머니인 강지연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오래된 본가로 향했다. 문을 열자, 한태성이 비행기표 한 장을 그녀에게 던졌다. “우리끼리 상의해 봤는데, 세린이는 남은 기간 동안 재헌이랑 같이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건 열흘 뒤 비행기표야. 기분 전환도 할 겸, 잠시 여행이나 다녀와.” 한서율은 묵묵히 비행기표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알았다. 한태성이 진짜로 바라는 건 자신이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라는 걸. 그녀가 떠나야, 그들은 죄책감도 사라질 테니까. 장미영이 울먹이며 덧붙였다. “서율아, 오해하지 마. 우리는 그냥... 세린이의 마지막을 편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야.” 그 말투, 그 변명... 너무 익숙했다.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한서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갈게요.” 이제 그녀는 윤재헌을 원하지 않았다. 이 집 또한, 더 이상 미련조차 없었다. 한태성은 잠시 놀란 듯 한서율을 바라봤다. 그녀가 이토록 순순히 물러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딸의 성격이 꺾였다고 생각한 그는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세린이를 위해 작은 송별식을 준비했어. 사흘 뒤니까 꼭 참석해.” “알겠어요.” ... 집으로 돌아온 한서율은 종이상자를 꺼내, 그 안에 윤재헌과 관련된 물건들을 하나씩 담기 시작했다. 그가 생일날 선물해 준 커플 머그컵, 처음 함께 본 영화의 티켓, 억지로 찍었던 스티커사진까지... 모두 조용히, 차례로 넣어갔다. 거의 다 정리해 갈 무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재헌이었다. 그의 시선이 상자 안을 스쳤다. 가득 쌓인 추억들이 한순간에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서율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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