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비행기 조난 사고당한 것처럼 만들어줘. 내가 현재현 곁을 무사히 떠날 수 있게.”
강지수의 요구를 들은 오랜 친구인 윤이영은 너무도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몇 년 전 강지수와 현재현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시골에서 태어나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던 강지수는 그 유명한 재경시의 재벌인 현재현을 만나게 되었고 집안 차이가 절대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수군대기에 바빴다. 현재현은 그저 언젠가 사라질 흥미 때문에 강지수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분명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첫사랑이 따로 있고 강지수는 그저 대용품일 뿐이라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정말로 결혼할지 안 할지를 두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결혼한 지 3년이 되어도 현재현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현재현은 늘 그렇듯 행동으로 그녀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말이지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었다.
애초에 현재현은 강지수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었고 그 뒤로 어떻게든 강지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매일 선물을 준비해 오는가 하면 강지수의 이름으로 기부도 하면서 전 세계 도움이 필요한 곳에 학교까지 지었다. 그리고 학교 이름은 ‘지수초등학교'로 지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강지수를 알고 강지수에게 고마움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만약 나중에 강지수에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생긴다면 그들이 서슴없이 나서서 도와주길 바랐다.
강지수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그는 강지수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을 찾아가 함께 서빙도 하고, 전단지도 돌리고, 택배도 분류했다. 집에서 물 한 방울 손에 묻혀 본 적 없이 귀하게 자란 그는 이를 악물며 그녀의 곁에 있었다.
바이올린만 켤 줄 알던 그의 고운 손에는 어느새 물집이 생기고 말았지만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가 보여준 성의 덕에 강지수의 마음을 얻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집안 형편이 차이가 나도 너무 났던지라 그의 집안에서는 당연히 반대했다.
그 뒤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그는 가법도 어겨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채찍으로 벌을 받게 되었고 지금도 그 흉터가 등에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허락해주지 않자 모든 상속권을 포기하고 직접 회사를 차렸다. 이렇게 해야 가족들이 더는 그의 연애에 간섭할 수 없으니까.
그와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그런 그를 보며 사랑에 미친 것이냐며 혀를 찼다. 평소에 그렇게나 똑똑하던 사람이 한 여자를 위해 평생 호사를 누리며 살 기회까지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현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족들도 더는 그를 설득할 수 없어 그와 강지수의 결혼을 허락해주었다.
결혼 후 현재현은 자신의 곁에서 일하는 직원을 전부 남자로 바꾸었고 강지수가 요구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정을 꼬박꼬박 말해주면서 직접 핸드폰에 위치 추적 앱까지 깔아 강지수가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네티즌들은 드라마틱하다며, 결국은 순애가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렇게 급속도로 그와 강지수의 이름이 인터넷을 가득 채우게 되었고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강지수를 제외하고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그녀만 바라보는 남자가 그녀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면서 쌍둥이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강지수는 머리가 어질거리며 속이 너무도 울렁거렸다.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현재현은 몇조에 달하는 계약 건까지 미뤄두고 바로 귀국해 그녀를 간호해 주었다.
눈을 뜬 강지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현재현을 보게 되었고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행여나 그녀의 몸으로 들어가는 수액이 차가울까 봐 그는 두 손으로 수액 줄을 꼭 잡고 따듯하게 녹이고 있었다.
“깼어? 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미치는 줄 알았어.”
현재현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강지수가 피를 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걱정이 가득하고 초췌해진 그의 몰골을 보니 강지수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의 눈빛에 담긴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만 이런 눈빛으로 본 것이 아니었다. 박예지에게도 이런 눈빛을 하면서 애정이 담긴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예지는 그의 내연녀이자 소꿉친구기도 했다.
현재현이 강지수에게 푹 빠져 졸졸 쫓아다닌다는 소식이 학교에 퍼지면서 박예지는 왕따를 주동해 그녀를 괴롭혔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르바이트하는 곳까지 찾아와 수모를 주었고 그 탓에 자주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기도 했다. 심지어 박예지는 양아치들을 찾아와 그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만들어 주려고 했지만 마침 그녀에게 고백하러 가던 현재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의 현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했다. 만약 그때 현재현의 어머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박예지를 죽여버렸을 것이다.
그랬기에 강지수는 현재현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나중에 두 눈으로 직접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더러운 영상과 아이들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야 믿게 되었다. 심지어 두 사람의 아이들은 한 살이나 되었다.
강지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베개를 적셨다. 현재현은 그런 그녀의 눈물을 보지 못했고 그저 피곤한 것으로 생각했다.
“지수야, 방금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네가 임신 8주 차래. 우리에게도 예쁜 아기가 생겼어!”
밖에서 차갑기만 하던 그는 지금 이 순간 아이처럼 기뻐했다.
“5일 후면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잖아. 거기다 네가 임신했으니 겹경사네!”
강지수는 눈을 번쩍 떴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그녀는 어느 날 아버지의 발길질에 차가운 강에 오랫동안 빠져 있게 되었고 그 뒤로 의사는 평생 임신할 수 없을 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원래부터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던 시부모님은 여러 번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현의 부모님이었던지라 그녀는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현재현은 참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주눅 들지 않게 차갑게 말했다.
“지수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저와 결혼해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데 왜 자꾸 그러시는 거예요. 만약 계속 아이 일로 불만을 드러내신다면 그럼 전 두 분과 연락을 끊고 앞으로도 찾아오지 않을게요.”
강지수는 손을 들어 배를 만졌다. 더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흐느끼고 말았다.
‘왜, 왜 지금 나한테 온 거야!'
현재현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달래 주었다.
“왜 울고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누가 괴롭힌 거야? 말해 봐, 내가 다 혼내줄게.”
그러나 강지수는 자신을 안고 있는 현재현의 몸에서 낯선 향수 냄새를 맡게 되었다. 게다가 분유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확 밀어낸 그녀는 침대 옆으로 몸을 숙이며 토했다.
입덧일 거로 생각한 현재현은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내밀어 받아내려고 했다. 토사물이 자신의 옷에 가득 튀어도 더럽지 않은 듯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지수를 보던 그는 그래도 임신했다는 사실에 아주 기뻐했다. 박예지가 임신하고 출산할 때도 그가 옆에서 보살펴 주었던지라 여자가 임신하며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얼마나 힘든지, 또 출산 후에 어떤 후유증이 남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강지수는 멍한 얼굴로 현재현을 보았다. 그녀는 현재현이 심각한 결벽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녀가 입는 옷과 신발도 전부 그가 직접 씻어주었다. 그는 3년 동안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던지라 그녀도 마음을 전부 준 상태였고 정말로 그가 없이는 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잠깐 이런 생각도 했었다. 현재현이 박예지와 헤어진다고 하면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다음 순간 문자를 확인하던 그는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겼다며 급하게 자리를 떴다. 반 시간 후 강지수는 박예지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게 되었다. 현재현이 쌍둥이 아이들을 안은 채 사랑스럽다는 듯 아이의 이마에 뽀뽀하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그 덕에 잠시나마 용서하고 싶었던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병원에서 나온 후 그녀는 바로 절친인 윤이영을 찾아가 비행기 조산 사고를 위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현재현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이런 부탁을 한 것이다. 그는 절대 그녀와 이혼해 주지 않을 거고, 놓아주지도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그녀를 향한 집착만 더 심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