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5화

이후 며칠은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 서나연은 막 데이터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실험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더니 송하인이 새파래진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나연아, 빨리 나가봐! 너희 엄마랑 네 동생이 지금 찾아와서 난리야! 보안 팀도 못 막는 것 같아!” 서나연은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날 집에서 나오며 지원을 끊었는데 이렇게 곧장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밖으로 나가니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부터 소리가 들렸다. 서동훈의 고함과 오나희의 울부짖음이 뒤섞여 실험실을 울렸고 입구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오나희는 바닥에 엎드린 채 땅을 두드리며 신세 한탄을 했다. “기가 막히네! 출세하더니 부모도 무시하는 거야?” 옆에 있던 서동훈은 보안요원에게 욕을 퍼부었다. “비켜! 내가 내 친누나한테 돈 달라고 찾아왔다는데 네가 왜 막아!” 서나연은 사람들 사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냐고?” 서동훈이 보안요원을 밀쳐내고 다가왔다. “누나, 요즘 잘나가나 보지? 예물도 준비해야 되는데 4천만 원이 없네? 그러니까 오늘 무조건 내놔.” “나는 매달 집에 생활비 보냈어. 그러니까 네 결혼은 네가 알아서 해. 난 이제 한 푼도 없어.” 서나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헛소리하지 마! 재민이 형이랑 있을 때는 펑펑 쓰더니 지금 버림받으니까 돈도 없는 거지?” 서동훈은 격분해 그녀를 세게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갑작스러운 공격에 서나연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내 손목과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며 피가 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던 소리도 사라지고 정적만 남았다. 서나연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무릎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살갗이 따끔거리며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보다 훨씬 아팠던 건 사람들 앞에서 동생에게 밀려 넘어진 순간 느껴진 굴욕감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없다고 했잖아.” “미친년, 감히 나한테 말대꾸를 하는 거야?” 서동훈은 이성이 완전히 끊긴 듯 옆 화분에 꽂혀 있던 금속 장식물을 들어 그대로 휘둘렀다. 폭력적인 장면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누군가 급하게 뛰어왔다. 쾅! 이윽고 현장에 둔탁한 금속 소리가 울렸고 장식물은 정확히 누군가의 등 뒤에 떨어졌다. 유재민이었다.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서나연을 완전히 가로막고 등으로 모든 충격을 받아냈다. 그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지만 서나연을 감싼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뭐지?’ 서나연은 멍해졌고 서동훈은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나희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덜덜 떨기만 했다. ‘우리 아들이 감히 재민이한테 폭력을 휘둘렀네.’ 돈뿐만 아니라 이제는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상황. 얼마 후, 유재민의 목소리가 울렸다. “경찰 부르세요.” 조용했지만 명확하고 단호했다. “CCTV 영상 확보하세요. 증거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내 멀지 않은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자 오나희와 서동훈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경찰에 끌려갈 때도 오나희는 억울한 듯 울부짖었다. “서나연! 내가 네 친엄마야! 너는 나한테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서나연은 말없이 그들이 경찰차에 올라타는 걸 지켜봤다. 상황이 정리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향해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서나연이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거리자 유재민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상처부터 치료하러 가자.” 서나연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문득 오래전 장면이 떠올랐다. 그 시절, 유재민은 이미 학교 게시판을 장악한 사람이었다. 수상 경력, 대회 실적은 항상 최고였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차가운 남자. 반면 서나연은 평범한 성적에 무관심한 부모를 둔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학생이었다. 둘은 절대 스칠 일 없는 평행선 같은 삶이었다. 그날 생리가 갑자기 시작됐고 책상과 의자에 붉은 얼룩이 번졌다. 그래서 모두가 나갔지만 서나연은 꼼짝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그때, 먼 곳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생리대 한 봉지와 교복 상의 하나였다. “다들 갔어.” 유재민은 피가 묻은 곳을 보지 않으며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밖에 비 많이 와. 그러니까 아무도 못 볼 거야.” 창밖에는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의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날 심장이 두근거린 소리는 창밖에서 들리던 빗소리보다 훨씬 컸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