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서현우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윤소율은 휴대폰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 기자들은 물러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이 문을 나서는 즉시 난 전 세계 언론에 다 알릴 거예요. 서 대표님이 어떤 비열한 방식으로 여자 연예인 술에 약을 탔는지.”
서현우는 조롱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날 협박해요?”
윤소율은 웃으며 그의 앞에 다가서서 얼음처럼 차가운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대표님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감히 협박할 수 있겠어요? 조건 하나만 들어주면 돼요.”
서현우는 무표정하게 윤소율의 작은 얼굴을 잡았다.
“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아요?”
수년간 극도로 자제하며 곁에 여자를 두지 않은 그였다.
윤서린을 제외하고 말이다.
윤서린이 죽은 지 5년 동안 그는 단 한 명의 여자도 건드리지 않았다. 임채은조차도.
임채은은 재벌가 출신으로 엄격한 집안 교육 때문에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지난밤에 그 금기를 깼다.
이 여자에게 한번 취하니 오히려 더 갈증이 일었다.
‘이러니 연예계 마녀로 불리며 당해낼 남자가 없다는 말이 돌지.’
“대표님, 전 많은 걸 원하지 않아요. 충분히 해줄 수 있잖아요.”
“뭘 원하는데요?”
“당신이... 내 남자가 되는 것.”
서현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윤소율은 가볍게 웃었다.
“명분은 필요 없고 각자 원하는 것만 얻으면 돼요. 귀신도 대표님께 붙으면 환생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전 환생까지 필요 없고 지원만 해주면 돼요.”
“난 연예계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아요.”
“네, 대표님은 우습게 생각하겠죠. 하지만 연예계 정보는 대표님이 손 하나 까딱하면 절로 들어오잖아요.”
“그게 조건인가요?”
‘이기적인 여자!’
“어때요? 대표님께는 쉬운 일이죠? 앞으로 대표님은 내 사람이에요. 첫째, 날 먹여 살리고 아껴주며 원하는 건 다 줘야 해요. 내가 원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줘야 해요.”
서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둘째, 그쪽은 내 남자니까 내가 필요할 때 부르면 언제든 와야 해요.”
“세 번째는?”
“셋째,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요. 내 어떤 요구도 거절해선 안 돼요.”
서현우가 음침하게 말했다.
“이게 그쪽이 말한 게임인가요?”
“왜요, 못하겠어요? 저한테 빚진 거잖아요.”
‘서현우, 당신이 내게 빚진 거야.’
“그래요.”
서현우가 차갑게 웃었다.
“원한다면 기꺼이 맞춰주죠.”
정장 속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고 서현우가 확인해 보니 임채은의 전화였다.
윤소율을 슬쩍 보고 끊으려는데...
“왜 안 받아요?”
윤소율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받기 싫은 건가요, 못 받는 건가요?”
화면에 저장된 ‘채은’이라는 이름이 문득 윤소율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녀는 항상 궁금했다. 서현우가 그녀의 전화번호는 뭐라고 저장했을지.
‘어떤 이름으로 저장했을까?’
“걱정하지 마요. 조용히 있을 테니까.”
말하며 윤소율은 입에 지퍼를 잠그는 동작을 취했고 그제야 서현우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우 오빠...”
임채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어났어?”
“응.”
오랫동안 침묵이 흐른 후 임채은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내일 저녁 연우에서 파티를 여는데 나랑 같이 가기로 했잖아. 잊지 않았지?”
“응, 기억해.”
“내일 오후 2시에 같이 보르데에서 드레스 피팅하고 파티에 가자.”
“알겠어, 시간 맞춰 갈게.”
“응.”
임채은이 망설였다.
“그럼... 이만 잘게.”
“아직 안 잤어?”
서현우는 눈썹을 찌푸렸고 윤소율은 무심코 그의 말투에 담긴 걱정을 느꼈다.
그녀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응, 오빠 소식 기다리느라... 걱정돼서 밤새 못 잤어. 오전에 또 촬영이 있어서 세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 해.”
“일찍 쉬어.”
“응. 요즘 너무 바빠서 일 끝나면 이안이랑 며칠 시간 보내려고.”
“그래.”
서현우는 전화를 끊었다.
윤소율은 그의 손에 든 휴대폰을 바라보며 무심한 척 언급했다.
“내일 연우 파티에 나도 초대받았어요.”
서현우가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자 윤소율이 말했다.
“만약 내 파트너로 같이 참석하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죠?”
“일부러 그러는 거죠?”
“왜요, 싫어요?”
윤소율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쉬운 부탁도 거절하는 건가요?”
“채은이가 작품 빼앗았다고 일부러 저격하는 건가요?”
“그래 보여요?”
윤소율이 담담하게 말했다.
“작품 하나 마음에 담아둘 정도로 난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에요. 다만...”
여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현국으로 돌아와서 참석하는 첫 번째 공개 행사인데 많은 기자가 몰려드니 당연히 현국에서 제일 대단한 남자를 파트너로 데려가야죠.”
서현우가 말이 없자 윤소율이 그의 팔짱을 꼈다.
“그렇게 하는 걸로 알게요.”
“아직 대답 안 했는데.”
“거절은 용납 안 해요. 아까 이미 어떤 조건이든 들어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서현우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구석 벽으로 몰아붙였다.
“내 여자가 되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남자는 윤소율의 귓가에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러는 그쪽은...”
“네?”
“당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걸 내가 원하기만 하면 줘야 해요. 나도 똑같이 거절은 용납 안 해요.”
말을 마친 서현우가 성큼성큼 자리를 떠나고 윤소율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다.
넓은 스위트룸에 홀로 남은 그녀의 뒷모습이 다소 쓸쓸해 보였다.
윤소율은 침대에 누워 팔을 벌리고 눈을 감자 서현우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
냉정한 남자...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누구도 뛰어넘지 못할 남자...
이런 남자가 과연 그녀의 치마폭에 굴복하고 그녀에게 빠지는 게 가능할까.
‘단단하게 굳은 마음이 언젠가 누군가를 위해 열리기는 할까...’
...
서씨 가문 저택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서현우가 차를 잠그고 대문 앞으로 걸어가니 집사가 공손하게 맞이했다.
“대표님 오셨어요.”
서현우는 무표정하게 코트를 건네주고 별장 3층으로 올라갔다.
3층 끝의 한 방으로 들어간 그가 천천히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따뜻한 침실은 윤서린이 예전에 살던 방이었다.
5년 전 그 사고 이후로 이 방엔 아무도 살지 않았지만 늘 제때 청소해서 구석구석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마치 그녀가 떠나지 않은 것처럼.
서현우는 침대에 앉아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참 후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난 또... 돌아온 줄 알았지.”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추측이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겠나.
그의 손으로 직접 포기한 사람인데...
그녀는 이미 죽었고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