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명진 별장.
임채은은 식탁 위를 가득 채운 풍성한 음식들을 바라보며 서러움이 잔뜩 밀려와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실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 임씨 가문의 어엿한 아가씨가 이런 천한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을 굳이 자처하며 고생할 필요가 있겠나.
하지만 서현우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서현우는 부족한 게 없었으니까.
나라에 버금가는 재부와 하늘을 찌르는 권력, 서씨 가문의 모든 요리사는 5성급 수준의 전문가들이었다.
임채은은 특별히 요리 영상을 보고 요리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직접 요리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남자는 안 먹는다는 말 한마디로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채은아, 그건 다른 사람이 해도 돼. 네가 할 필요 없어.”
“다르잖아!”
“뭐가 다른데?”
“내가 하는 것과 그 요리사들이 하는 건 다르잖아!”
“나에게는 다 똑같아.”
서현우의 목소리는 혼잡한 소음 속에서 유난히 차갑게 들렸다.
임채은은 완전히 굳어버려 휴대폰을 움켜쥔 채 얼굴이 상기되었다.
“현우 오빠...”
“내 말대로 해. 10분 후에 기사가 와서 데려다줄 거야.”
말을 끝낸 서현우는 전화를 끊었다.
오랫동안 임채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기름이 튀어서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바라보며 억울함에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5분 후, 기사가 도착해 문 앞에 서서 공손히 말했다.
“임채은 씨, 대표님께서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했어요.”
임채은은 주먹을 꽉 쥔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임채은 씨!”
...
클럽.
윤소율은 느긋하게 서현우의 품에 기대어 그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임채은?”
서현우는 말이 없었다.
“임씨 가문 아가씨가 한 사람을 위해 직접 요리까지 할 줄이야. 맛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호기심이 들었다.
과거 윤소율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서씨 가문에서 자랐고 요리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들이 많았지만 서경수가 집에 없으면 그녀는 식탁에 앉을 자격도 없었다.
서씨 가문 사람들은 항상 윤소율을 배척했고 서경수가 지켜주지 않았으면 진작 집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평소 간단한 음식으로 허기를 때우는 것에 익숙했다.
다만 가끔은 요리사들이 만드는 화려한 요리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몰래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마침내 요리사들의 솜씨를 80% 정도 배웠다.
한 번은 윤소율이 몰래 부엌에 들어가 세 가지 요리와 한 가지 국을 만들었는데 먹기도 전에 요리사들이 저녁 식사인 줄 알고 식탁에 올렸다.
듣기론 그날 밤 서현우가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고 한다.
당시 윤소율은 서현우를 오랫동안 사랑해 왔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기쁨을 느끼며 지칠 줄 몰랐다.
하지만 5년 전 그 화재 이후로 다시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다.
불이 무서웠다.
주위를 휩쓸며 끝없이 타오르는 불길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평소 촬영할 때 아무리 힘든 장면이라도 직접 소화했지만 불만은 예외였다.
불과 관련된 장면이라면 반드시 대역을 고용했다.
윤소율은 술잔을 들어 잔 속의 액체를 가볍게 흔들더니 붉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단번에 들이켰다.
...
클럽 대문 앞에 마이바흐가 주차되어 있었고 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며 서현우를 바라보았다.
“대표님, 타시죠.”
서현우는 윤소율을 돌아보며 말했다.
“타요.”
“괜찮아요. 기사가 데리러 올 거예요.”
남자는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는 안 되죠.”
윤소율은 얼떨결에 뒷좌석으로 끌려들어 갔고 이내 서현우도 차에 오르더니 문이 굳게 닫혔다.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대표님, 저를 집으로 데려가려고요?”
서현우는 앞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대표님, 집으로 데려간다면서 왜 이렇게 차갑게 굴어요?”
윤소율이 엉겨 붙었다.
“당당하게 집으로 데려갔다가 임채은과 마주치면 어떻게 설명하려고요?”
“뭐요?”
서현우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서워요?”
말을 마친 그가 기사에게 명령했다.
“명진으로 가.”
“네.”
기사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제대로 앉지도 못한 윤소율은 떠밀리는 강한 힘에 뒷좌석에 쓰러질 뻔했다.
서현우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얌전히 있어요.”
명진으로 데려가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확인하려 했다.
아직 포기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윤소율은 시선을 내리며 마음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명진? 명진 별장?’
그 별장은 서현우가 평소 거주하는 곳이었다. 조용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을 좋아했던 그는 사람을 데려가는 일이 드물었다.
윤소율의 손이 천천히 가방 쪽으로 뻗어갔다.
...
반 시간 후 차량은 명진 별장 지하 주차장에 멈췄다.
오는 내내 윤소율은 이미 졸려서 잠들기 직전이었다.
차 문이 열리고 서현우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려요. 내가 부축해 줘야 합니까?”
“왜 그렇게 거칠게 굴어요? 대표님, 여자에게 좀 더 부드럽게 대할 수 없어요?”
“난 여자에게 다정하지 않아요.”
“설마요. 여자에 대한 기본 매너도 없어요?”
윤소율은 말하며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내릴 수 있게 부축해 줄래요?”
서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공중에 떠 있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펼친 손이 옥으로 조각한 듯 아름다웠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서 여자의 손을 잡았다.
윤소율은 그의 도움을 받아 한쪽 다리부터 천천히 내려오며 균형을 잡았다.
서현우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급히 할 일이 있는 듯 인내심을 잃어갔고 윤소율이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였다.
“서현우 씨, 왜 그래요!”
남자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 엘리베이터는 전체 별장 건물에서 유일한 VIP용 엘리베이터로 서현우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층수를 누르고 윤소율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서현우는 윤소율의 손을 잡고 문으로 가서 그녀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잡고 지문 패드를 열었다.
윤소율은 흠칫했다.
‘그래서... 명진으로 데려왔구나.’
그녀의 지문을 확인하기 위해서!
서현우가 명진 별장을 사들였을 때 총 세 개의 지문을 등록할 수 있었는데 그중 두 개는 모두 윤소율의 지문이었다.
‘이렇게 자세한 것까지 생각했어? 지문으로 확인할 생각을 하다니.’
윤소율은 긴장되는 마음에 손을 빼려 했지만 서현우가 손목을 잡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
“무슨 짓이에요?”
윤소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집 지문에 왜 제 손가락을 갖다 대요?”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압니까?”
“굳이 해봐야 아나요?”
윤소율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난 여기 온 적도 없는데 왜 내 지문이 여기 있겠어요?”
주저하는 그녀의 모습을 눈치챈 서현우는 도발적으로 말했다.
“왜 피해요? 불안하기라도 해요?”
“아...”
윤소율은 몇 초 동안 생각하다가 눈동자에 웃음을 머금었다.
“대표님, 아직도 포기 못 하고 날 그 여자라고 의심하는 건가요?”
서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럼 어디 포기하게 해봐요.”
말하며 서현우는 강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잡더니 패드에 눌렀다.
윤소율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인지 아닌지 그게 중요해요?”
서현우는 짜증스럽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중요하든 아니든 그건 그쪽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중요하다면 5년 전에 왜 그 여자를 선택하지 않았어요? 분명 살릴 수 있었잖아요.”
윤소율은 감정이 격앙되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차분해졌을 때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여우가 꼬리를 드러냈네요.”
격앙된 감정은 오히려 그녀가 바로 윤서린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게 아니면 왜 흥분하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고작 이런 따분한 일로 날 데려온 건가요?”
말하며 윤소율은 서현우의 손을 힘차게 뿌리쳤다.
“집으로 갈 거예요.”
그녀가 가려는데 서현우가 잡아당겨 벽에 밀어붙였다.
남자가 고개를 숙여 윤소율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좁은 공간에 그녀를 가두었다.
“말했죠. 그쪽이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서현우는 다시 윤소율의 손을 움켜쥐고 강제로 그녀의 검지를 지문 인식 패드에 눌렀다.
2초가 흐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