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임가을은 욕설을 퍼붓고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
이제 방 안에 나랑 임태경만 남았다.
나를 바라보는 임태경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윤재야, 이리 와봐.”
말을 마치고 먼저 소파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임태경은 빨갛게 부어오른 내 뺨을 힐긋 쳐다보았다.
잠시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3년 전 오해만 없었어도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 일이 아니었어도 저는 계약서에 사인했을 거예요. 임씨 가문을 위해 일하겠다는 제 뜻은 변함이 없어요.”
임태경이 고개를 들었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네 여동생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들인 거잖아. 우리 가을은 어릴 때부터 철이 좀 없었지. 게다가 3년 전엔 큰일이 날 뻔하기도 했고... 결국 널 오해까지 하고 말이야.”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내가 입을 열며 말을 끊었다.
“어차피 계약도 얼마 안 남았어요. 한 달만 지나면 전 자유예요.”
임태경은 묵묵부답했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 뒤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보상 차원에서 내가 어느 정도 지원해줄게. 대신 부탁 하나 해도 될까?”
갑자기 정적이 찾아오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뭔데요?”
“남은 한 달 동안만이라도 가을이 말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녀석도 이제 세상 돌아가는 법을 좀 배워야 하니까. 다만 천천히 적응할 수 있게 시간을 좀 줘.”
...
나는 말없이 임태경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딸을 향한 지나친 애정이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계약대로 성실히 이행할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 말만 남기고 나는 뒤돌아섰다.
3년 전, 대학교 졸업 기념 술자리.
당시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진 임가을이 하마터면 나쁜 사람에게 끌려갈 뻔했다.
마침 양아치들에게 해코지당하기 직전인 학교 동문을 목격하자 나는 재빨리 뛰어가 그녀를 부축해 근처 호텔로 데려갔다.
하지만 위치 추적으로 찾아온 임태경은 오히려 내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인 줄 알았다.
자칫 경찰에 넘겨져 감옥까지 갈 뻔했다.
다행히도 대학교 생활 내내 모범생이자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었던 덕분에 선생님들이 나서서 사정해주었고, 그제야 진정한 임태경이 뒤늦게 CCTV를 확인했다.
결국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임씨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내가 구금됐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찾아오던 여동생은 그만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임태경은 그때부터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약을 제안했다. 임가을의 곁에 두어 항상 그녀를 지켜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내 학력도 임가을을 돕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로서 임태경은 자기 딸이 어떻게 명진대에 들어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일들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빛이 희미한 차고 안, 매캐한 연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친구들은 말했다.
“완전 임씨 가문 시종이네.”
“돈에 굴복한 노예지.”
“임가을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호구 아니야?”
결국 주변 사람은 하나둘 내 곁을 떠났다. 임가을이라면 찍소리도 못하고 자존심마저 내팽개쳤다고 여겼다.
심지어 고향 친척들조차 등을 돌렸다.
“기껏 돈 많은 사람의 종노릇이나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거야?”
그들은 날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매일 병원에서 나오는 여동생의 치료비가 얼마나 비싼지 나만 알고 있었다.
설령 명진대를 졸업하고 순조롭게 취직했어도 여동생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임씨 가문 때문에 당한 교통사고였고, 그런 집안의 돈으로 여동생을 살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임씨 가문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또 임가을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증오까지는 아니었다.
참으로 모순된 감정이다.
임씨 가문 덕분에 현재의 능력과 자원, 인맥, 그리고 혼자서 이렇게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3년이란 시간으로 여동생의 한 줄기 생명과 맞바꾼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어느덧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꽁초에 손가락이 델 뻔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담배를 껐다.
이제 끝내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