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강다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경찰이 와 있었다. 그녀가 가족임을 알자 경찰은 진술을 요구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차에 아빠가 혼자 있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한밤중에 집에도 안 오고 네 시간 동안이나 도로를 돌았다고?'
‘차에 문제 생겼는데도 브레이크를 안 밟았다니...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야?'
강다윤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때 수술실의 불이 꺼지고 문을 나서는 의사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의사는 마스크를 벗으며 예전에 생긴 무릎 부상 때문에 오래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혈류가 막혀 일시적인 마비와 경직 증상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브레이크를 밟지 못한 건 아마 그것 때문일 겁니다.”
경찰은 찡그린 얼굴로 강다윤을 노려보았다.
“가족이면서 아버지 무릎 상태도 몰랐습니까?”
강다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의사는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무책임한 자녀군요. 혹시라도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했다면...”
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다윤은 이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유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이정미의 경고도, 유하진의 경도도 전부 잊혔다. 강다윤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의문만 남았다. 이렇게까지 말을 잘 듣고 순응했는데 왜 유씨 가문 사람들은 또 자신의 아버지를 괴롭힌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은 유호준의 졸린 목소리가 들려와 강다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주무고 계셨어요? 저희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유호준은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자세하게 설명해 봐. 내가 언제 네 아버지한테 나를 데리러 오라고 했지?”
강다윤은 저녁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간단히 설명했고 곧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
“회장님 지시가 아니었다면 아빠가 자정에 밖으로 나갈 리 없어요! 아빠는 회장님 말씀만 듣잖아요!”
그러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사실 유씨 가문 사람이라면 그녀의 아버지를 불러낼 수 있었다.
유호준은 그녀의 안색을 보고 바로 전화를 걸어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간호사가 급히 달려와 핸드폰을 건넸다.
“고인의 핸드폰으로 누군가 계속 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강다윤은 핸드폰을 낚아채듯 받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왜 아직도 안 와요? 그럼 당신의 귀한 딸한테 전화할 거예요. 불쌍하지 않아요? 머리 상처도 아직 안 나았을 텐데 또 고생하겠네요.”
임지영의 오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강다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임지영! 우리 아빠를 죽인 게 너였어!”
그러자 전화기 너머는 잠시 조용해졌다.
임지영은 강다윤이 전화를 받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는지 당황한 듯 이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내가 문 앞에서 몇 분이나 기다렸는데. 왜 네 아빠는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강다윤, 지금 당장 여기로 안 오면...”
“우리 아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강다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만족해?”
전화기 너머에서 짧은 욕설이 터졌다.
그리고 강다윤은 임지영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씨X, 재수 없게. 이제 막 귀국했는데 또 부모님한테 쫓겨나게 생겼네. 하진아...”
유호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역시 통화 내용을 들은 모양이다.
“유하진의 약혼녀는 네가 아닌가? 그런데 한밤중에 왜 임지영이 유하진과 함께 있는 거지?”
강다윤은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삼킨 채 말했다.
“하진 씨가 시력을 되찾은 뒤로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어요. 사모님도 제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고요. 그래서 전 아버지랑 떠나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못 가게 막았어요. 우리가 조금만 일찍 떠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전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사모님은 왜 저랑 아버지를 놔주지 않는 거죠?”
그러자 유호준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자신의 ‘착한 아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좋은 명성 때문이지. 남들이 보기에는 관대하고 현명하고 착한 사람으로 보여야 하니까. 네가 유하진을 3년 동안 돌봤다는 건 세상이 다 알아. 그런데 하진이가 시력을 회복하자마자 널 내보내면 사람들이 전부 다 이정미를 욕하겠지.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리는 냉정한 여자로.”
“하, 내가 그 말을 믿고 이정미를 집안으로 들였던 게 실수였어. 난 하진이가 혼외자식이라고 비웃음 받지 않게 하려고 한 건데.”
강다윤은 그제야 모든 걸 이해했다.
어쩐지 이정미가 아버지의 사직서를 분노로 받아들였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모든 짓을 유호준 몰래 벌였던 것이다.
강다윤은 병실 문을 잠그고 커튼을 단단히 닫았다. 그리고 유호준을 등진 채 조용히 옷을 벗었다.
유호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등에는 수없이 겹쳐진 상처 자국이 가득했던지라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강다윤은 옷을 다시 입고 돌아섰다.
“이제 아시겠죠? 왜 하진 씨가 그 3년 동안 제 말만 들었는지. 제가 제일 순종적이었고 신분이 낮았으니까요.”
“하진 씨는 실명한 뒤로 마음이 뒤틀려졌어요. 아무에게도 미쳐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대신 저에게 분풀이했죠. 분풀이가 끝나고 나면야 비로소 약을 먹었고요.”
유호준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거부할 수도 있었잖아. 나한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다윤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아니요, 회장님. 지난 일들은 묻고 싶지 않아요. 제 유일한 바람은 아버지와 제가 이곳을 떠나게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일은... 하진 씨나 사모님께 절대 알리지 말아주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