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한세희의 얼굴에 맺혀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었다.
짧은 정적이 스쳐 지나갔고, 이도원은 그녀의 말투에서 무언가를 읽어낸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뜻은 없어, 세희야. 너도 알잖아. 나 이제 곧 졸업이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니까... 이번 기회에 사람들이랑 안면 뵙고 싶어서 그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도와줄 거지?”
그 목소리에는 한세희가 좋아했던 애교가 담겨 있었다.
그 작은 온기가 그녀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 응.”
한세희가 힘없이 대답하자 이도원이 짧게 답했다.
“고마워.”
짧은 감사 인사를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통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녀의 상태를 묻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한세희의 상처가 누구 때문인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눈앞에 어젯밤의 정경이 생생히 재생되었다.
피범벅이 된 벽과 흐려지는 시야. 그리고... 휘청이는 한세희.
“으으...”
한세희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전부 환각이야.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환각을 본 거였어... 후... 전부 환각이야...’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박연지가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세희야, 너... 혹시 이도원, 네가 생각하는 만큼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럴 리 없어.”
정황상 정확한 추리에도 한세희는 단호하기만 했다.
“걔가 날 안 좋아했으면 그때 목숨 걸고 날 구했겠어?”
그녀의 시선이 손목의 희미한 흉터에 닿았다. 칼날이 스쳤던 자리. 얼음처럼 차갑고 오래된 고통의 잔상.
한세희는 옅게 웃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손님에게 시비를 당하던 아르바이트생과, 그 곁을 지켜준 잘 사는 집 아가씨.
이도원의 얼굴은 그녀의 취향을 저격했고 그날 이후 둘 사이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초반의 이도원은 평범했다. 다른 남자들과 별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연애 3개월째 되던 날, 데이트 중 광기로 눈을 물들인 남자가 흉기를 들고 두 사람을 위협했다.
그 순간 이도원은 망설임도 없이 한세희를 강하게 밀쳐냈다.
예리한 칼날은 결국 그의 몸에 꽂혔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으로 나를 지키는 걸.
그날 이후, 한세희는 모든 유흥을 끊었다. 파티도, 클럽도, 술자리도... 모든 삶의 결을 이도원에게 맞추기 위해.
이도원은 한세희를 지켜준 사람이었고 그녀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 한씨 가문의 연회장은 유달리 화려했다.
샹들리에가 내뿜는 불빛이 유리잔에 번지고 계단 아래로 붉은 카펫이 비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성공과 친분을 은근히 과시하며 잔을 부딪쳤다.
한세희는 등에 난 상처가 드러나지 않는 드레스를 골랐다.
등 라인이 단정하게 올라온 다크 네이비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곁에 선 이도원은 완전히 반대되는 색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조명 아래 그의 얼굴선은 더 날렵하게 살아났고, 잠시 숨을 멈추고 보게 될 정도로 말끔했다.
“가끔 네 얼굴 보면 진짜... 어디 좋은 집안 도련님처럼 보여.”
한세희가 이도원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도원은 말없이 미소 지은 채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을 받쳐주었다.
따뜻한 손길이었지만 한세희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언니? 다행이야! 안 올 줄 알았는데...”
순간 밝은 목소리가 공간을 가르며 다가왔다.
‘... 최지영.’
부드럽고 말랑한 분위기, 입꼬리 옆에 조용히 패인 보조개.
한세희와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얼굴.
최지영은 한세희의 손을 맞잡으며 반가움을 표현했지만 그녀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한세희가 최지영의 손을 쳐내며 답했다.
“안 오긴? 여긴 원래 내 집이었어.”
그녀는 네 자리가 어디인지 잊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로 말에 악센트를 넣으며 웃었다.
그에 최지영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은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여긴 당연히 언니 집이지. 난, 난 한 번도...”
최지영은 바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한세희를 힐끔거렸다.
‘아, 또 저 표정.’
그녀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은 한세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한 번도 뭐?”
한세희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네 엄마가 남의 가정을 쑥대밭 내고도 뻔뻔하게 너까지 들이밀지 않았으면 네가 지금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에 처했겠어?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지? 늙은이가 끝까지 자기 성을 안 내준 게 분해 죽겠지? 인정 못 받아서 미칠 것 같지 않아?”
“한세희! 너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한병철이 분노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한세희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친어머니에게 약물을 주입해 다른 남자의 침대로 밀어 넣은 그 사건 이후, 한세희는 단 한 번도 한병철을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천박한 외도 끝에 데려온 아이가 바로 최지영이었다.
한세희가 코웃음 치며 이도원의 팔을 껴안았다.
자리를 뜨려 했으나... 그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이도원의 시선이, 아주 깊고 뜨겁게, 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최지영이었다. 마치 세상에 그녀 하나만 존재하는 듯한 시선.
한세희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눈빛이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순간, 긴장을 찢는 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피해요!!!”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고 사람들이 일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매달린 대형 샹들리에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사를 잃은 듯, 내려앉기 직전의 불안한 움직임.
유리 조각들이 금빛 진동 속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한세희는 본능으로 손을 뻗었다.
이도원을 끌어내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그러나 그녀의 손끝이 움켜쥔 건 차가운 허공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남자가 지금은 최지영의 손을 붙든 채 온몸으로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 순간 샹들리에가 거대한 굉음을 만들며 바닥에 떨어졌다.
쿵!!!
바닥이 흔들릴 만큼 강렬한 충격. 유리 파편이 하얀 비처럼 흩어졌고 입안 가득 비릿한 향이 퍼졌다. 한세희의 시야에서 색감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의식이 꺼지기 직전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 선명히 남았다.
‘이도원이 찾던 사람은 처음부터 최지영뿐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