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그러나 윤라희가 바라본 그 자리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이유 없이, 마음속에 덜컥 빈자리가 생긴 것처럼 묘한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그 순간, 윤라희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더없이 쓸쓸하고 애달파졌다.
관객들은 이미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그 비통한 공기가 끝없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곡의 분위기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손끝에 실린 절묘한 떨림과 섬세한 울림이 처연했던 멜로디를 살짝 비틀어 점점 더 부드럽고, 따스하고, 생기 넘치게 바꿔 갔다. 마치 절망의 끝자락에서 조금씩 희망이 피어나는 듯했다.
그 변화는 결코 어색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 곡처럼 자연스럽고 이어지는 흐름엔 단 한 치의 위화감도 없었다.
분명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곡인데, 마치 [꽃]이라는 작품은 애초에 이런 곡이었다는 듯 완벽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음악은 관객들의 감정을 이끌었다. 무겁고 가라앉았던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던 감정은 밝고 유려한 선율을 따라 미소로 피어났다.
눈물 자국이 마르기도 전인데, 사람들은 어느새 울면서 웃고 있었다.
관객석의 반응을 스치듯 훑은 윤라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꽃]을 연구할 때, 그녀는 줄곧 궁금했다.
왜 이 곡은 미완성으로 남겨졌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불완전함도 하나의 아름다움이라고.
혹은 거문고 여인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절망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긴 공백이라고.
하지만 윤라희의 생각은 달랐다.
[꽃]을 깊이 들여다본 그녀는 이 곡이 단순한 운명에 대한 분노가 아니며 끝내 함께할 수 없었던 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곡이 미완성으로 남은 이유는 거문고 여인이 그와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랐던 결말은 무엇일까.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윤라희는 용기 내어 상상했다. 그녀가 남기지 못한 후반부는 분명 밝고 따뜻한 세상을 그리는 선율이었을 거라고.
마치 현실에선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다른 차원, 다른 세계에서는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그래서 그녀는 오래도록 연구하고 고민했다. 그 여인의 삶에 마지막으로 따뜻한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어서 윤라희는 [꽃]의 끝을 완성해냈다.
쨍.
경쾌하고 유려한 마지막 음이 가볍게 울리며 모든 비통함과 눈물, 그리고 행복했던 순간들까지 한 폭의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공연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관객들은 한동안 넋을 놓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물범벅의 얼굴과 환하게 웃고 있는 표정들이 동시에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뜨거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방금 뭐가 지나간 거야?”
“그냥 한 곡을 들었을 뿐인데, 진짜 인생 한 편을 겪은 기분이야. 지금도 꿈꾸는 것 같아.”
“이런 [꽃]은 처음이야. 진짜 소름 돋았어.”
“그런데 원래 [꽃》에 저 후반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윤라희가 새로 만든 거겠지. 그런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진짜 원래 그랬던 곡 같았어. 이게 바로 [꽃]의 완전한 형태 아닐까?”
객석 이곳저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막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만나고 있었다.
처음엔 너무 슬퍼서 다들 눈물을 흘렸고, 하지만 어느 순간 웃고 있었다.
절망으로 시작해 희망으로 끝나는 곡. 이보다 관객의 감정을 더 완벽하게 조율한 연주는 없었다.
무대 뒤, 조서영은 손에 쥐고 있던 물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벌떡 일어선 그녀는 얼굴에 이전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황과 공포가 스쳤다.
‘말도 안 돼... 윤라희가 어떻게 [꽃]을 끝까지 연주할 수 있지?’
끝까지 연주한 것만 해도 놀라운데, 어떻게 후반부를 그렇게까지 완성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단순한 편곡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을 자연스럽게 녹여내 하나의 완성형으로 만들었다.
그건, 마스터급 작곡가라 해도 쉽게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굳이 결과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관객들의 반응만 봐도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조서영이 조금 전 보여준 무대는 분위기를 최고조까지 끌어올렸다면 윤라희의 무대는 그야말로 폭발시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