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역시 넌 머리가 잘 돌아가. 투자자한테 윤라희를 대역으로 추천했다며? 이제 진짜 볼만하겠는걸?”
매니저 진윤석은 기대에 찬 얼굴로 조서영을 바라봤다.
조서영은 붉은 입술을 적시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눈빛은 하찮은 벌레라도 내려다보는 듯 싸늘했고 입꼬리는 경멸로 비틀렸다.
“윤라희 따위가 뭐라고. 걔가 나랑 비교될 급은 아니잖아.”
“그럼. 요즘 대세는 너잖아. 걘 이미지 완전 박살 났고. 대역 시켜준 것도 아까울 정도야.”
조서영은 손끝으로 자신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연기든 외모든 자신이 밀릴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늘 윤라희에게 밀려야 했을까.
왜 스포트라이트는 늘 윤라희의 차지였고 자신은 얼굴도 비추지 못한 채 대역으로 가려져 있어야 했을까.
‘대중의 사랑을 받을 사람은 애초에 나였어. 윤라희, 넌 그냥 내 대역일 뿐이야.’
“계속 실검 돌리고 댓글 작업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끝장내버릴 거야.”
조서영의 눈빛은 어느새 매서운 독기로 물들었다.
‘윤라희, 기어이 복귀하겠다고 덤빈 거라면 똑똑히 알려줄게. 지금 이 바닥 주인이 누군지. 넌 그냥 내가 던진 떡밥일 뿐이야. 내 새 작품 홍보에 써 먹힌 것만도 고마운 줄 알아.’
...
“이게 말이 돼?!”
쨍그랑.
책상 위에 놓인 꽃병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주강혁은 핏대가 서도록 분노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윤라희는 깨진 꽃병 조각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거 지난번에 길거리에서 4천 원 주고 산 건데... 아깝네. 도시락 두 개 값은 되는데.’
“넌 진짜 화도 안 나?! 지금 인터넷에서 널 어떻게 욕하는지 못 봤어?!”
“봤어.”
“하, 그 기사 틀림없이 조서영이 흘린 거야. 여신은 무슨 얼어 죽을 여신. 실력도 없는 게 어그로 끄는 재주는 진짜 타고났어. 노력해서 떴다고? 뭘 노력했는데? 안 대표한테 들이댄 거? 칠십 넘은 노인네한테까지 들러붙어 놓고는 자수성가라고?”
주강혁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거침없이 쏟아냈다.
“자기 노력으로 주인공 됐다고? 웃기고 앉았네! 걔는 그런 말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대? [침묵의 서약] 주연 자리를 어떻게 따낸 건지 모를까 봐? 그 주제에 감히 널 깎아내려? 그딴 어설픈 연기로 배우는 무슨.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윤라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조서영은 처음엔 순진한 척 잘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빛 속에 숨겨둔 야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떻게든 데뷔하려고 별수를 다 썼다.
예전엔 조서영이 먼저 다가와 이것저것 부탁도 하고 살갑게 굴던 때도 있었다.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을 때도 윤라희는 기꺼이 도와줬다. 하지만 윗선에서는 윤라희 한 명이면 충분하다며 굳이 비슷한 이미지를 더 들일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조서영은 회사에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윤라희가 자기 데뷔를 견제해 일부러 막은 줄로 착각했고 점점 윤라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게 훗날 윤라희가 몰락하고 조서영이 무리 없이 그녀를 대신해 데뷔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정말 닮아도 너무 닮았다.
주강혁은 분을 못 이겨 방 안을 쉴 새 없이 오갔다.
“예전에 걔네 아버지가 도박 빚에 쫓겨서, 걔가 술집에 나가서 일하게 됐을 때 네가 불쌍하다고 대역 일까지 맡겨줬잖아. 그런데 결과가 뭐야? 보답은커녕 이렇게 뒤통수를 쳐?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어떻게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있어.”
당시 조서영은 가진 것 하나 없이 술집에서 일하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윤라희는 안쓰러운 마음에, 또 어딘가 자신과 닮아 보이기도 해서 그녀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대역 자리까지 마련해줬다.
윤라희는 철저한 배우였다. 아무리 힘들고 위험한 장면이라도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소화했다. 윤라희에게 있어 조서영은 그야말로 허울뿐인 월급 도둑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서영이, 윤라희가 악플에 시달리며 바닥까지 추락한 틈을 타 그녀의 모든 걸 송두리째 빼앗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얼굴이 나오지 않는 장면은 전부 자신이 찍었다며 윤라희를 갑질하는 배우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주강혁도 연예계에서 오래 굴러먹었지만 조서영처럼 뻔뻔한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그 얼굴로 자긴 대역 아니었다고? 얼굴에 칼 세 번이나 댄 거 내가 다 아는데! 원래는 너랑 딱히 닮은 구석도 없었잖아. 지금은 뜯어고쳐서 겨우 비슷해진 거지. 얼굴도 어색하게 굳어 있는 주제에 자연미인이라고 떠들어?”
주강혁은 울분을 터뜨렸다.
“거문고도 독학했다던데? 와, 진짜 그 말 듣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오더라. 걔 거문고 누가 가르쳤는데? 네가 다 알려줬잖아.”
예전 촬영장에서 조서영은 하루도 빠짐없이 윤라희 옆에 붙어 다니며 온갖 아양을 떨었다. 물과 커피를 챙기는 건 기본이었고 신발까지 들고 뛰고 다리까지 주물렀다. 보기 민망할 정도로 비위를 맞추며 찰싹 달라붙어선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윤라희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도 붙잡고 조르는 통에 윤라희는 피곤한 와중에도 바보같이 정성껏 가르쳐줬다. 그런데 이제 와선 독학했다는 말 한마디로 그 모든 공을 슬쩍 가로챘다.
나중에 조서영이 정식 데뷔한 뒤,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재능 있는 아티스트 이미지를 씌우기 위해 개인 교습 선생님만 몇 명을 붙였다.
“독학은 무슨. 웃기고 있네. 참 뻔뻔하기도 하지.”
윤라희의 깊고 맑은 눈동자를 마주한 주강혁은 괜히 마음이 아려왔다.
모두 그의 잘못이었다. 늘 곁에서 챙기고 보호해 주기만 하다 보니, 정작 윤라희는 이 바닥이 얼마나 잔혹한 곳인지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윤라희는 자신의 인생 4분의 3을 연예계에서 보냈고 이곳만큼 자신에게 잘 맞는 곳도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윤라희야말로 이 바닥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연예계를 떠나기 전까지는 줄곧 탄탄대로였고 그동안 연예계의 어두운 단면은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처럼 조서영이 머리 꼭대기에서 짓밟고 있는데도,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유순한 성격으로 이 험한 바닥에서 어떻게 버티겠다는 건지...’
며칠 전, 주강혁은 새로 맡은 신인 배우 문제로 정신이 없었다. 그 사이에 윤라희는 어이없게도 대역 제안을 받게 되었다.
이미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었으니,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었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주강혁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맞다, 너 예전에 거문고 잘 쳤잖아. 실력 녹슬진 않았지?”
윤라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아마도?”
“몇 급이야?”
“몰라. 그런 시험은 본 적이 없어.”
윤라희는 원래 전통 악기를 좋아했다. 순수하게 취미로 배운 거지 시험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주강혁은 얼른 휴대폰을 뒤적이더니, 한 대회의 공고문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국악 경연 대회에 나가볼 생각 없어?”
이 대회는 3년에 한 번 열리는 권위 있는 행사로 국악단의 단원을 선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상위 세 명은 곧바로 국악단에 입단할 수 있었고 그 무대는 단순한 예능 프로그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수준이 높았다. 수많은 민속악 인재들이 한 번은 꼭 서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이기도 했다.
실제로 연예계에도 거문고나 해금, 대금 같은 전통 악기를 다루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이 대회는 그들에게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입단만 해도 격이 몇 단계는 단숨에 올라가는 셈이었다.
“조서영도 올해 신청했어. 너도 나가고 싶으면 내가 한번 알아볼게.”
이런 대회는 자격 심사부터 까다로워서 아무나 나갈 수 없었고 참가 자격을 얻는 것조차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윤라희가 조용히 주강혁을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한 장의 신청서를 꺼내 보였다.
“이미 신청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