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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정장을 입은 남자는 언뜻 보면 무심하게 서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어서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고지수는 그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혼한 뒤 그녀는 가정을 돌보는데 온 신경을 쏟아부으며 노민준의 아내로, 노재우의 엄마로 살았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고지수는 전시회 담당자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는 걸 보았다. 담당자가 남자에게 뭐라고 한 것 같았다. 그녀의 작품과 관련된 얘기인 듯했다. 고지수가 가까이 다가가자 담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Rita 씨가 누군지 몰라요. 이 작품은 대표님 친구분이 이곳에 걸어놓으라고 하신 거라서요. 비매품이에요.” 심동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고지수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고지수와 심동하의 눈빛이 마주쳤다. 심동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고지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에 고지수는 조금 당황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었어요. 이건 제가 찍은 사진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고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는 마치 산뜻한 바람 같기도, 하늘 높이 떠 있는 흰 구름 같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의 이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같지는 않았다. 심동하는 굳이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동하가 몸을 돌려 떠났다. 이때 담당자가 고지수의 앞으로 걸어가서 정중하게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Rita 씨, 이건 제 명함입니다. 혹시 앞으로 작품을 전시할 생각이 있다면 저희에게 연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지수는 살짝 설렌 마음으로 명함을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고지수는 전시회장을 쭉 둘러보다가 유현숙이 전시회장 밖에 서 있는 걸 보았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조금 전 고지수가 만났던 그 남자였다. 유현숙은 그에게 뭔가 얘기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떠났다. 몸을 돌린 유현숙은 고지수를 발견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그녀에게 걸어갔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았으면 내 아들을 소개해 줬을 텐데. 내 아들은 줄곧 남편이 키웠어. 그리고 너희 어렸을 때 본 적 있어.” 유현숙의 말을 들은 고지수는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여름방학이었을 것이다. 고지수는 매일 뜨거운 햇빛 아래, 그의 창문 아래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불렀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내밀면 그에게 같이 놀자고 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은 심동하야. 기억할지 모르겠네.” 고지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심동하? 동명이인인가?’ “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명안의 대표거든.” “...” “네 전남편도 명안 다닌다고 했던가?” “네...” “그러면 네 전남편 상사겠네?” “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유현숙은 그 순간 눈을 빛냈다. “그러면 동하한테 얘기해서 네 전남편을 자르라고 할게!” 고지수는 그녀의 말에 감동했다. 그러나 유현숙이 그런 일을 저지르게 할 수는 없었다. “이모,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알지만 그러면 안 돼요. 그 사람 직급도 꽤 높고 능력도 나쁘지 않아서 명안을 떠난다고 해도 금방 월급 많이 주는 직장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유현숙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고지수는 진우정의 하나뿐인 딸이었기에 유현숙은 그녀를 자신의 친딸처럼 챙겨주고 싶었다. 전시회장을 떠난 뒤 유현숙은 고지수와 함께 쇼핑하러 갔다. 유현숙은 고지수가 다시 사진 촬영을 시작할 생각이라는 말을 듣고 유명한 브랜드의 카메라와 비싼 카메라 렌즈 네 개를 사서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현숙이 고지수를 매우 아낀다는 소문이 퍼졌다. 유현숙의 생일날, 고지수는 그녀를 위해 목걸이와 팔찌, 반지 세트를 사주었고 직접 그녀를 위해 음식까지 해주었다. 그 뒤로 유현숙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하고 다녔고, 심지어 고지수가 사준 선물을 매일 끼고 다닐 기세였다. “아무리 그래도 친엄마는 아니잖아요. 곁에 아이가 없어서 겨우 이런 걸로 감동한 거 아니에요?” 유현숙은 싸늘해진 얼굴로 전미주를 바라보았다. 유현숙과 전미주는 앙숙이어서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친척인 동시에 최근 사업적으로도 얽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초대장을 보내야 했다. 쌍둥이 남매를 낳은 전미주는 유현숙의 앞에서 늘 자기 딸이 얼마나 세심한지, 아들과 며느리가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지, 남편이 얼마나 자상한지를 자랑했었다. 그때마다 유현숙은 본인이 한 달에 남자 친구를 여덟 번 갈아치운 적이 있는데 그들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고 그녀를 매우 즐겁게 해주었다고 자랑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은 계속됐다. 전미주가 말했다. “ 지수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 지수랑 연락 거의 안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현숙 씨를 찾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요.” 유현숙은 지지 않았다. “미주 씨 며느리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한다고 들었어요. 미주 씨가 400억은 줘야 낳을 생각이라고 하던데 그거 진짜예요?” 전미주가 곧바로 미소를 거두고 반박했다. “요즘 아이 키우는 거 힘들잖아요. 걔가 요구하지 않아도 줄 거예요. 그런데 현숙 씨는요? 현숙 씨 지수 엄청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한 번도 귀국해서 지수 만난 적은 없죠? 그동안 지수 은근히 무시한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왜 갑자기 착한 척이에요?” “내가 언제 지수를 무시했다고 그래요? 우리 지수가 얼마나 훌륭한 아이인데, 질투나서 그러는 거죠?” 고지수는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 말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고지수는 유현숙이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과 싸우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위층으로 올라가서 그녀를 말릴 생각이었다. 전미주가 계속하여 유현숙을 공격했다. “조금 전에 지수 결혼반지 안 끼고 있던데 이혼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마음에 들면 현숙 씨 아들이랑 결혼시키든가요!” 유현숙은 전미주를 째려보았고 전미주는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서 이혼한 데다가 아이까지 딸렸는데 나였어도 싫었을 거예요. 현숙 씨, 우리 솔직해지자고요.” “이혼한 게 뭐 어때서요? 미주 씨 너무 꽉 막힌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요. 이혼한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도 괜찮은지. 아무리 예뻐도 아이가 있는데 누가 원하겠어요?” 전미주는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아무도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자 전미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유현숙을 향해 보란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미주가 말했다. “그냥 심심풀이로 만나는 건 괜찮겠지만요.” 유현숙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차갑게 웃더니 살기 어린 눈빛으로 전미주를 바라보았다. “미주 씨는 진짜 사람 보는 눈이 없네요. 다른 사람도 미주 씨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혹시 미주 씨 아들이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운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우리 집안은 인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우리 지수는 인품이 정말 훌륭하죠. 저한테 지수는 이미 예비 며느리예요.” 그 순간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계단에 서 있던 고지수는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했다. 고지수를 발견한 유현숙은 자신의 곁에 앉으라는 듯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봤죠? 요즘 세월에 얼굴도 예쁘고 인품도 훌륭한 사람을 찾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저는 이런 아이가 제일 좋아요. 내숭 떨고 가식 떠는 애들은 너무 싫죠.” 유현숙이 말한 내숭 떨고 가식 떠는 사람은 전미주의 조카 안미진이었다. “우리 동하도 이런 여자애를 좋아해요. 예전에는 기회를 한 번 놓쳤는데 이번에 지수가 이혼하면서 다시 기회가 생겼지 뭐예요. 어쩌면 다음 해에 다들 우리 애들 결혼식에 참석해야 할 수도 있어요.” 전미주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고지수는 허리를 숙이고 유현숙의 귓가에 대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 저 편들어주시는 건 고맙지만 그런 말씀은 안 하셔도 돼요. 저 괜찮아요.” 유현숙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엄마도 이젠 없는데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 그리고 난 너뿐만 아니라 내 못난 아들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심동하?’ 고지수의 머릿속에 심동하의 모습이 그려졌다. 심동하는 마치 하늘이 정성 들여 빚은 조각상처럼 잘생겼고 분위기도 남달랐다. 그런 사람을 못난 아들이라고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유현숙은 고지수를 자신의 옆에 앉히며 말했다. “나도 너희 둘을 확실히 결혼시키겠다고 하지는 않았어. 그냥 이모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어. 우리 아들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너무 많은데 너는 우리 아들을 대신해서 그 여자들을 막아준다고 생각해. 만약 앞으로 내 아들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또는 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때 가서 해명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고지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모, 심 대표님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를 텐데 한 번 의논해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난 동하 엄마야. 의논할 필요가 없지.” ... “심 대표님, 내년에 알고 지내던 지인과 결혼하신다고 들었는데 진짜인가요?” 심동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래요?” “심 대표님 어머님이요.” “저도 들었어요. 축하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굽신거리며 웃으면서 술잔을 건넸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동하는 상대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명이 시작을 떼자 다들 다가와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심동하는 표정이 차갑게 굳더니 잠시 자리를 피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권예준은 심동하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뭔가를 짐작하고는 짓궂게 말했다. “설마... 모르고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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