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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심동하가 아까부터 한마디도 않고 있자 고지수는 점점 더 조바심이 났다. 늘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저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고지수는 그저 땅만 바라보며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자신이 고지수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잘잘못을 따져 자신을 내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 고지수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어차피 내칠 거면 빨리 말이라도 좀 해주지.’ “전화는 왜 안 받아요?” “무서워서요.” “선생님이 고지수 씨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뭐?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의 말에 머리가 띵해진 고지수가 다급히 물었다. “그럼 왜 아는 척 안 했어요?” “지수 씨가 나 속이는 데 나라고 속이지 말란 법 있어요?” “...” ‘역시 대표라서 그런가 생각하는 게 남다르네.’ 고지수는 그제야 심동하가 왜 자꾸만 자신을 보고 웃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정체를 숨기려고 아등바등하는 걸 보며 얼마나 웃었을까, 그저 원숭이가 공연하는 것 같았겠지?’ 아까도 노민준을 피해 성인용품 가게로 들어간 뒤 아무 말이나 막 해대며 상황을 무마했었는데 심동하는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 그저 장단을 맞춰준 거였다. 고지수는 이런 게 바로 철저한 복수가 아닐까 싶었다. “화났어요?” “아니요. 제가 자초한 일인데요 뭐.” 그녀의 표정 변화에 심동하의 입꼬리도 살며시 올라갔다. “이 사슴은 며칠만 여기 두기로 한 거라서 약속한 시간 되면 주인이 와서 찾아갈 거에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고지수는 잠시 벙쪄있다가 답했다. “잘됐네요 그럼.” “짐은 다 정리했어요?” “네.” “그럼 이제 갈까요?” 심동하가 발걸음을 돌리자 고지수가 그의 뒤를 따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 그럼 이제 저 용서해주시는 거예요?” “아니요. 아직 하나 남았어요.” 그의 단호한 대답에 눈을 크게 뜨던 고지수는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게 뭔데요?” “나한테 직접 와서 해명하든 묻든 했어야죠. 이렇게 숨을 게 아니라. 내가 안 왔으면 내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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