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화

“강 비서님, 사직 처리 건은 윤 대표님이 결재까지는 하셨어요. 그런데 정작 퇴사자가 강 비서님인 줄은 못 보신 것 같아서요. 제가 따로 알려 드릴까요?” 전화 너머로 들려온 말에 강유진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괜찮아요. 그냥 이대로 진행해 주세요.” “그래도 강 비서님은 윤 대표님 곁에서 4년이나 일하셨잖아요. 윤 대표님이 제일 만족해했고,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 강유진 비서님인데... 정말 다시 생각 안 해 보세요?” 인사팀 직원이 애타게 설득했지만 강유진은 작게 웃고 말았다. “세상에 누가 누구 없으면 못 살겠어요. 부모님도 편찮으시고, 저는 고향 내려가서 선 자리도 보고 결혼 준비도 해야 해요. 윤 대표님이 결재하셨으면 절차대로 인수인계하고, 한 달 뒤에 떠날게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통화를 끊고 나서야 강유진은 다시 짐 정리를 이어 갔다. 이 저택에서 산 지 3년이었다. 짐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강유진은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렸다. 방이 조금씩 비어 가는 걸 바라보자 강유진은 순간 멍해졌다. 비워진 자리로 지난날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8년 전,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자란 강유진은 한빛대에 합격했고, 서울 강북 재벌가 아가씨인 윤이안과 단숨에 절친이 됐다. 두 사람은 집안 형편이 하늘과 땅 차이였는데도 신기하게 잘 맞았다. 같이 수업 듣고, 밥 먹고, 쇼핑하며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 그러다 보니 강유진도 자연스럽게 윤이안의 세계 안으로 들어갔고, 윤이안의 가족을 알게 됐다. 그러다가 끝내 윤이안의 오빠인 윤태현까지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강유진은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가슴속에 묻었다. 졸업 후 윤이안은 유학을 떠났다. 강유진은 서울에 남아 이력서를 넣었고 윤태현의 비서가 됐다. 윤태현을 자주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터졌다. 윤태현이 누군가에게 약을 탄 걸 알게 됐고 강유진은 급히 병원에 연락하려 했다. 그런데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윤태현이 강유진을 벽으로 몰아붙였다. 숨도 돌릴 틈 없이 키스가 쏟아졌다. 그날 밤은 어긋난 채로 뜨거웠고, 한 번 시작된 흐름은 끊기지 않았다. 뒤엉킨 하룻밤이 지나고 눈을 떴을 때, 윤태현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선이 또렷한 얼굴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가려져 있었고, 분위기는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했다. 기척을 느낀 윤태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물었다. “강유진, 너 날 좋아해?” 강유진은 본능적으로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윤태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날 볼 때마다 얼굴 빨개지는 거, 내가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 전부 외우는 거, 졸업하자마자 내 비서로 들어온 거...” 윤태현이 한 단어씩 박아 넣듯 말했다. “그게 다 우연이라고는 하지 마.” 순간 강유진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인지 들켜 버린 게 창피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지던 그때, 윤태현이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어젯밤은 사고였어.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네 마음에는 답을 주지 못하겠어. 책임도 못 져.” 윤태현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더 차갑게 말을 정리했다. “이안이한테 들었는데 넌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라고 하더라. 이 카드에 든 돈이면 평생 걱정 없을 거야. 어제 일은 다 잊어.” 강유진은 멍해졌다. 그리고 그제야 떠올랐다. 어젯밤, 윤태현은 침대에서 분명 어떤 이름을 계속 불렀다. “청아야... 서청아.” 윤이안이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서청아는 윤태현이 평생 못 잊는 첫사랑이라고 했다. 서청아는 윤태현과 헤어지고 해외로 나가서 그곳에서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윤태현은 서청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윤태현은 기다린다는 말을 고집처럼, 버릇처럼 붙들고 있었다. 윤이안이 툭툭 투덜대며 했던 말도 강유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윤씨 가문 사람들은 원래 다 냉정하잖아. 그런데 태현 오빠는 왜 저렇게 정이 깊어? 몇 년을 기다리면서도 서청아가 아니면 다 대충 만나는 거라더라.” 강유진도 그 말이 어떤 감정인지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강유진은 문을 나서려던 윤태현을 급히 불러 세웠다. “저는 돈이 필요 없어요.” 강유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끝까지 말을 붙잡았다. “기회 하나만 주세요. 태현 씨, 저랑 한 번만... 만나 봐 주세요. 서청아 씨가 안 돌아오면 그대로 가면 되고요. 서청아 씨가 돌아오더라도 태현 씨가 아직 못 놓겠으면... 그때 제가 먼저 떠날게요.” 윤태현은 사랑이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유진을 보더니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짧게 한마디만 남겼다. “네 맘대로 해.” 윤태현은 그 말만 남기고 그대로 나갔다. 그날 이후 강유진은 낮에는 윤태현의 비서였고, 밤에는 윤태현의 잠자리 상대가 됐다. 사무실에서도, 마이바흐 안에서도, 별장의 통유리 앞에서도... 두 사람은 수없이 사랑을 나눴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둘 사이에 그런 관계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유진도 그 사실을 견뎠다. 견디는 게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며 살았다. 그러다 며칠 전, 윤태현의 생일이 왔다. 강유진은 선물도, 이벤트도, 준비할 수 있는 건 전부 준비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와도 윤태현은 오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에 뜬 건 윤태현의 SNS에 뜬 게시물 하나였다. [최고의 생일 선물은,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것.] SNS 한 번 올리지 않던 윤태현이 불꽃놀이 아래에서 서청아와 키스하는 사진을 올렸다. 사진을 보는 순간, 강유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고 심장이 꽉 조여 왔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확인하고 싶었던 강유진은 윤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건 서청아였다. “여보세요?” 서청아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강유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자 서청아가 느긋하게 윤태현을 불렀다. “태현아, 강유진이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왔는데... 왜 전화해 놓고 말이 없어? 누구야?” 잠시 뒤, 윤태현의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별로 중요한 사람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러더니 윤태현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자기야, 다시 자자. 좀 더 자.” 그 순간 강유진은 자신이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강유진은 짐을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현관에서 윤태현과 마주쳤다. 그동안은 매일 함께 잠을 잤고, 강유진도 편하게 지내라고 윤태현의 별장에서 지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강유진이 상자를 끌어안고 있는 걸 본 윤태현은 시선을 잠깐 굳혔지만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집은 구했어?” “네. 예전에 살던 원룸요. 집주인한테 말해 놨어요. 한 달만 더 살기로 했어요.” 윤태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한 달? 왜?” 강유진이 설명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윤태현은 그다지 관심 없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데려다줄게.” 강유진은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윤태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눈도 너무 많이 오고, 시간도 늦었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안이가 속상해할 거야.” 결국 강유진은 차에 올랐다. 한때는 그 차 안에서도 수없이 어지러운 일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차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차 안 여기저기 귀여운 인형이 놓여 있었고 시트커버는 헬로키티로 바뀌어 있었으며, 군데군데 간식까지 가득했다. 윤태현 같은 사람이 차를 이렇게 꾸며 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윤태현은 늘 단정하고 냉정했고, 효율만 중히 여겼으며 차갑고 절제된 사람이었다. 윤태현은 강유진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짧게 설명했다. “청아가 이런 걸 좋아해.” 강유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았다. 한참 침묵한 뒤에야 강유진은 낮게 말했다. “드디어 서청아 씨를 기다리던 끝에 다시 만났네요. 태현 씨, 축하해요.” 윤태현은 예상 못 했다는 듯 눈빛이 잠깐 가라앉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한참 달리던 중 서청아에게 전화가 왔다. 같이 눈사람 만들고 싶다는 말이었다. 윤태현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바로 가려다가 옆자리에 앉은 강유진을 보고 잠깐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무엇인지 강유진도 알았다. 강유진이 먼저 문을 열면서 말했다. “태현 씨, 저는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응.” 윤태현은 짧게 대답하고는 내려서 짐을 옮겨 줬다. 그때 강유진의 손이 미끄러졌다. 상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안의 물건들이 눈 위로 쏟아졌다. 윤태현은 허리를 숙이다가 가로등 불빛 아래 흩어진 물건을 보고, 몸이 순간 굳었다. 윤태현 이름이 적혀 있는데도 한 번도 건네지 못한 연애편지, 언제 찍었는지도 모를 몰래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윤태현이 무심코 버린 걸 강유진이 주워 와서 모아 둔 자잘한 물건들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강유진은 허둥지둥 물건을 주워 담았다. “미안해요.” 윤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태현은 그대로 차에 올라타더니 눈길을 가르며 빠르게 떠나 버렸다. 강유진은 눈 속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상자를 끌어안고 걸어서라도 돌아가려던 순간, 스쿠터가 강유진을 들이받았다. 정강이 쪽이 길게 찢어지며 20센티미터가 넘는 상처가 생겼고, 피가 눈 위에 흥건히 번졌다. 스쿠터는 멈추지도 않고 그대로 달아났다. 강유진은 차가운 숨을 들이켜며 이를 악물었다. 눈밭에 한동안 쓰러져 있다가,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강유진은 절뚝이며 네 시간이나 걸어 겨우 원룸에 도착했다. 상처를 대충 처치한 뒤 휴대폰을 켰다. 윤태현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윤태현이 떠난 뒤에 보낸 메시지였다. [앞으로는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좋아하지 마.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많아. 나한테 매달려 살지 마.] 강유진은 그 문장을 오래, 아주 오래 바라봤다. 날이 밝자 강유진은 건물 아래에서 불을 붙였다. 상자 한가득 담겨 있던 물건을 전부 불 속에 던져 넣었다. 타들어 가는 종이와 천 조각 사이로, 강유진 몸속에서 8년 동안 꺼지지 않던 뜨거움도 함께 재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태현 씨, 태현 씨가... 원한 대로 할게요.’
이전 챕터
1/23다음 챕터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