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7월의 끝자락, 여미주는 자이안에서 라임시로 향하는 마지막 비행을 마쳤다.
휴게실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비행일지를 제출하러 가는데 문을 열자마자 캐리어를 끌고 서 있는 지석주와 마주쳤다.
“미주야, 네 남편 또 기사 터졌어!”
여미주의 소꿉친구인 지석주는 준수하고 깔끔한 외모에 승무원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스튜어드였다.
그와 같은 스타일의 미남들이 인기가 아주 많았다. 퍼스트클래스를 타는 재벌 중년 여자들이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는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석주의 말에 여미주는 잠깐 멈칫했지만 별 반응 없이 캐리어를 끌면서 앞으로 걸었다.
“비행기가 추락했대? 그래서 팔다리라도 부러졌대?”
지석주가 킥킥댔다.
“진 기장님이 너랑 키스할 때 독살 안 당했어? 너처럼 독설 퍼붓는 사람이 없다니까.”
여미주는 말없이 웃으면서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지석주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30분 전에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진 기장님이 객실에 있던 연약하고 예쁜 여자를 직접 안고 응급실로 달려갔대. 내가 알아봤는데 그 여자 이름이 문가희더라고.”
‘문가희...’
여미주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지더니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쩐지.’
진우진은 밖에서 늘 냉정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저렇게 통제력을 잃게 만드는 사람은 첫사랑이자 명목상 양동생인 문가희뿐이었다.
지석주가 옆에서 계속 떠들었다.
“이 일이 지금 다 퍼져서 다들 문가희가 진 기장님이 숨겨둔 아내가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어. 미주야, 이러다 내연녀가 네 머리 꼭대기에 앉을 판인데 계속 결혼 사실을 공개 안 할 거야?”
처음엔 둘 다 제니스 에어 항공부 소속이라 여미주가 먼저 결혼 사실을 숨기자고 했다. 하여 양가 친척과 친구들 외에 동료 중 지석주만 여미주와 진우진이 결혼한 지 3년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미주는 이젠 공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될 대로 되라지, 뭐.”
애초 이 결혼은 진우진이 여미주의 계략에 넘어가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진씨 가문에서는 아직도 그녀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년, 이제 곧 끝이 난다.
...
어두운 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한여름 밤의 벌레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여미주는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댄 채 스탠드 불빛을 빌려 책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침대가 푹 꺼지더니 뒤에서 누군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남자의 매력적이고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어두운 데서 책 보면 눈 나빠져.”
여미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진우진은 허리만 만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거칠고 강렬한 입맞춤이 예민한 귓불에서 목덜미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근육질의 팔로 그녀가 보던 책을 닫아버렸다.
“자기야, 숙제해야지.”
“...”
다들 진우진이 절제력이 있고 매너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미주만 알고 있었다. 그가 성욕이 넘치는 짐승이라는 것을.
여미주는 목덜미에서 퍼지는 전율을 참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은 안 하고 싶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우진이 압도적인 힘으로 그녀를 뒤집어 품에 안고 키스했다.
여미주의 차가운 입술이 붉어졌고 진우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편한테까지 쑥스러운 척은. 이따가 기분 좋아지면 소리 내지 마. 소리 안 내면 빨리 끝내줄게.”
“...”
사실 진우진과의 잠자리를 그녀도 즐겼다. 적어도 이쪽 방면에서는 둘의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속궁합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이혼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그럭저럭 살아도 되지 않을까?’
여미주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진우진이 잠옷의 레이스 부분을 어루만졌다.
간질간질한 촉감에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먼저 가서 샤워해.”
진우진이 여미주를 번쩍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같이 씻자.”
“난 이미 씻었어.”
“한 번 더 씻어.”
“...”
몇 시간 뒤.
여미주가 정신을 딴 데 팔아서 그런지 진우진은 도통 만족을 못 하고 끝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욕실 물소리가 멎었다.
진우진이 한 손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천천히 나왔다.
물방울이 단단한 가슴과 복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생기고 귀티 나는 얼굴에 그제야 만족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의 시선이 침대 쪽으로 향했다.
여미주가 여성용 담배를 피우면서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예쁜 옆모습이 희뿌연 연기 속에 숨었다가 드러났다. 걱정이 가득한 듯 눈빛이 한없이 어두웠다.
평소 그녀는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았다. 꺼내 피웠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진우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 다가가더니 그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았다.
여미주는 그제야 정신이 차리고 그를 쳐다봤다. 그녀가 피우던 담배를 입에 가져가려 하자 재빨리 막았다.
“담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새것 피워.”
진우진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네 입술이 닿았던 게 더 맛이 좋아.”
“...”
여미주는 사실 조금 결벽증이 있었다. 키스는 괜찮아도 상대의 침이 묻은 음식이나 물건은 꺼렸다.
하여 담배를 도로 빼앗아 재떨이에 꾹꾹 눌러 꺼버렸다.
“진우진, 할 얘기가 있어.”
그녀는 시선을 늘어뜨렸다. 담배를 끄는 사이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뭔데?”
“우리...”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는데 서랍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우진의 휴대폰이었다.
여미주는 무심코 서랍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우진이 휴대폰을 집는 사이 마침 발신자를 보고 말았다.
[가희.]
갑자기 숨이 멎는 듯했고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으며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문가희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진우진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알았어. 지금 갈게.”
진우진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옷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말했다.
“먼저 자. 할 얘기는 내가 들어온 다음에 해.”
여미주는 손바닥이 다 욱신거렸다.
늦은 밤에 그녀를 버려두고 급하게 나간 게 처음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젠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괴로운 마음에 진우진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내 말 한마디 들을 시간도 없어? 문가희가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렸어? 의사도 아닌 당신이 가서 뭐 하게? 전생에 특효약이기라도 했어?”
진우진이 단추를 채우다 말고 어두운 눈빛으로 꾸짖었다.
“여미주, 그 독한 성격 좀 고쳐.”
여미주가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못 고쳐. 싫으면 빨리 나랑 이...”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여미주가 하던 말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감돌던 뜨거운 기운이 사라지고 차가운 고독만 남았다.
여미주는 커튼을 걷고 코닉세그의 붉은 테일 라이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그 불빛에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드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 바로 그녀가 7년을 사랑한 남자였다.
아무리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문가희의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걸 제쳐두고 달려갔다.
다음 날 아침.
여미주는 온몸에 힘이 쭉 빠져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옆에 놓인 베개를 더듬었는데 차갑고 평평했다. 누운 흔적이 전혀 없었다.
진우진이 밤새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려 확인해보니 그 인간이었다.
몇 초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긴 했지만 귀에 댄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우진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잠꾸러기,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일어나?”
여미주는 가슴이 뭔가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진우진은 늘 이랬다. 전날 밤에 아무리 심하게 싸워도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능글맞게 놀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