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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여미주는 1초 정도 지나서야 진우진의 말을 이해했다. ‘이혼 합의서를... 찢어버렸다고?’ “그걸 왜 찢어?” ‘당신이 사랑하는 첫사랑한테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아? 그럼 빨리 이혼하기를 바라야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우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건들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글씨를 너무 못 써서 눈에 거슬렸어.” 황당하면서도 도발적인 이유였다. 여미주는 저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어머님이 당신 낳을 때 뇌랑 탯줄을 같이 잘라버린 건 아니지?” 진우진은 화를 내기는커녕 혀를 차면서 그녀의 붉은 입술을 훑어보았다. “독설 실력은 여전히 줄지 않았네.” “...” 여미주는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던지며 여미주를 화나게 했고 그러다 화를 내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벤틀리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한여름의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진우진의 깊은 눈빛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 허리춤의 옷감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 “요즘 어디서 지내?” 여미주는 그를 피해 고개를 돌렸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허리에 얹은 그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고 숨결이 날카로워졌다. 경고이면서도 협박인 것 같았다. “말 안 해도 괜찮아. 내가 직접 알아보면 되니까.” 여미주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진우진이 대외적으로는 그저 제니스 에어의 기장이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사실 그는 여러 고급 클럽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 라임시 명문가들의 정보망을 장악하고 있다는 걸 여미주는 알고 있었다. 이 안에는 일부 재벌가의 은밀한 이야기도 있다고 들었다. 여미주는 직접 본 적이 없는데도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진우진이 그녀가 지석주네 집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아내기라도 한다면 홧김에 지석주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 여미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솔직하게 말했다. “회사에 직원 숙소를 신청했어. 심사가 완료될 때까지 며칠 동안은 석주네 집에서 지내려고.” “지석주?” 진우진이 기억을 더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그 이름을 떠올렸다. “소꿉친구였다던 그 승무원 동기?” “응.” 여미주가 짧게 대답했다. 진우진의 잘생긴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고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여미주, 지금 다른 남자랑 한집에서 살겠다는 거야?” 그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눈앞에 있는 남편이 죽기라도 했어?” 여미주가 바로잡았다. “단둘이 사는 건 아니야.” “그럼 여자친구도 있단 말이야?” 여미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어. 두 사람이 한방을 쓰고 난 다른 방을 써.” 사실 지석주네 집에서는 하룻밤밖에 자지 않았다. 이틀은 해외 비행을 나가 회사에서 제공한 숙소에 머물렀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짐이 석주네 집에 있어. 저녁에 같이 바비큐 먹기로 했거든. 기사님한테 길가에 차 세워달라고 하면 안 돼?” 진우진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들었다. “주소 알려줘. 짐 가지러 같이 가자.” “짐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바비큐야.” 이미 지석주와 약속했기에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진우진이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아주머니, 우리 와이프가 오늘 저녁에 바비큐를 먹고 싶다네요. 푸짐하게 준비해주세요.” “...” 여미주는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진우진, 제발 억지 부리지 마.” 진우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어루만지면서 짙은 갈색의 매혹적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주야, 내가 정말 억지 부릴 땐 넌 항의할 기회조차 없을 거야.” 그의 눈빛에 여미주는 저도 모르게 19금 장면들이 떠올랐다. 가까스로 정신을 바로잡고 야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난번에 본가에 갔을 때 제대로 듣지 않은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할게.” 여미주는 진우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진우진, 나 이혼하고 싶어.”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두 눈에 담긴 어둠을 가렸다. “진심이야?” “응.” “이유는?” 여미주는 잠시 생각한 후 양쪽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을 내놓았다. “부부 사이에 이젠 금이 생겼어.” 진우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이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한참 동안의 침묵 끝에 그의 눈빛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바람났어?” 여미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바람난 건 당신이지.” ‘계속 당신 옆에 붙어있는 여자가 하나 있잖아.’ 진우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증거 있어? 내가 바람피우는 걸 봤어?” 여미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진우진이 아직 여동생이라는 관계를 고려하고 있기에 문가희와 실질적인 관계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게다가 현재 문가희의 몸이 좋지 않아 몰래 실질적인 관계를 갖기도 어려웠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여미주의 모든 억울함, 슬픔, 고통은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진우진이 양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여미주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에 여미주는 직접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진우진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진우진은 하루 종일 병원에서 문가희를 간호했고 심지어 문가희에게 선물까지 줬었다. 또 섣달 그믐날 밤에 진우진과 크게 싸웠는데 진우진은 밤새 들어오지 않고 문가희와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산 정상에 올라갔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3년 동안 너무나도 많이 일어났다. 매번 여미주가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히스테리를 부릴 때마다 모두 그녀만 비난했다. 진우진과 문가희는 그저 남매일 뿐인데 여미주가 질투심이 많고 옹졸해서 동생에게까지 질투를 느낀다고. 아무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기형적인 삼각관계로 인해 여미주는 정신적으로 무너질 지경이었다. 가슴속 가득한 분노를 쏟아내지 못해 이젠 무력감만 남았다. 그녀는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조금 떨렸다. “진우진, 정말 더는 당신이랑 살고 싶지 않아.” 진우진의 눈빛이 깊고 어두워졌다. 차 안에 2, 3분 정도 침묵이 흘렀고 진우진이 점점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우리가 그때 왜 결혼했는지 잊지 마. 진씨 가문은 네가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여미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는 나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어. 그리고...” 그녀는 약간 죄책감이 들어 하던 말을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그건 정말 사고였어.” 마지막 두 단어를 들은 순간 진우진의 눈빛이 확 굳어졌고 차 안이 저기압으로 가득 찼다. 그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여미주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어 올려 강제로 눈을 마주치게 했다. “너한테 무슨 사정이 있든 상관없어. 네가 날 먼저 건드린 건 사실이잖아. 내가 그만하자고 하기 전까지 날 벗어날 생각 하지도 마.” 그 일에 있어서 진우진에게 미안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일로 진우진에게 결혼을 강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차라리 진우진의 큰형이 여자를 모질게 내쳤던 것처럼 그녀를 라임시에게 내쫓아버리기를 바랐다. 지금처럼 하룻밤의 욕정을 탐하면서 문가희와 남몰래 깊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미주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요 며칠 서연정과 곽희자에게서 받은 수모, 그리고 늘 목구멍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인 문가희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다. 그 가시를 삼키기엔 너무 아파 더 이상 삼키지 않고 진우진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여미주는 진우진의 준수하지만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때 당신이랑 딱 한 번 잤을 뿐인데 지난 3년간 나한테 잠자리를 얼마나 많이 요구했는지 잊었어? 이젠 충분하지 않아? 마음에는 딴 여자를 품었으면서 나랑 밤마다 그런 짓을 하는 게 그 여자한테 안 미안해? 진우진, 당신 정말 비겁한 인간이야.” 진우진이 그녀의 턱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더했다. 충격이 지나간 후 그의 두 눈에 폭풍 전야처럼 무서운 붉은 빛이 감돌았다. “다시 한번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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