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전화를 끊은 뒤, 예우미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발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정이현과 함께 살던 아파트였다.
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봤다.
분명 따뜻하고 행복했던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낯설고 차갑기만 했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목걸이, 팔찌, 인형, 립스틱...
한때는 보물처럼 아끼며 사랑의 증거라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조롱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목걸이를 쓰레기통에 던지려던 순간, 현관문이 열리면서 정이현 아니, 정윤재가 들어왔다.
그는 형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부드럽게 말했다.
“우미야, 뭐 버리고 있어?”
예우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정이현과 똑같이 생긴 얼굴을 똑바로 노려봤다.
조금 더 젊고, 오만하게 웃는 얼굴,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다시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 물건들, 다 네가 줬던 선물이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끝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소가 묻어 있었다.
정윤재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그러나 금세 아무 일 없다는 듯 말을 돌렸다.
“눈이 왜 그렇게 빨개? 오늘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때문이지?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처리했어. 글은 전부 삭제했고 앞으로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할 거야. 대학원 추천도 어차피 다시 받을 수 있잖아. 아니면 아예 안 해도 돼. 그냥 내 회사로 와. 내가 널 먹여 살릴게.”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정말이지, 이 형제들은 똑같았다.
둘 다 연기와 거짓말에 능했고 사람의 마음을 장난감처럼 다뤘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윤재가 먼저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됐어, 울지 마. 울면 내 마음도 아프단 말야.”
익숙한 체온과 냄새가 코끝을 스쳤지만 이제는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웠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따라 내려왔고 손끝이 허리를 감싸 천천히 움직였다.
과거의 예우미였다면 얼굴이 붉어지며 수줍게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피가 식는듯한 느낌에 힘껏 그를 밀쳐냈다.
정윤재가 당황한 표정을 짓다 곧 태연하게 웃었다.
“왜 그래?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
예우미는 시선을 피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나 샤워 좀 하고 올게.”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예우미는 다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용 서랍, 침대 옆 탁자, 벽에 걸린 사진까지 그들과 자신을 이어주던 모든 흔적을 없앴다.
모든 걸 치우고 나서야, 그녀는 지친 몸을 침대 위에 던졌다.
얼마 후, 물소리가 멎고 욕실 문이 열렸다.
정윤재는 물기 어린 머리로 다가와 그녀 옆에 눕더니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고 따뜻한 입술이 귀밑을 훑었다.
예우미는 눈을 감은 채 숨을 죽였다.
잠이 들 듯 아득해지려던 찰나, 그의 입에서 흐릿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경하 누나...”
그녀의 눈이 번쩍 떴다.
‘그래서 그랬던 거야. 정이현뿐 아니라 정윤재도...’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마다, 이들은 언제나 박경하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우미는 이를 악물고 다시 그를 밀쳐냈다.
“말했잖아. 오늘은 정말 몸이 안 좋아.”
목소리가 떨리고 부서진 듯 나왔다.
정윤재는 놀란 듯 잠시 멈췄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알았어. 안 건드릴게. 그냥 안고만 있을게, 됐지?”
그는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고 그저 뒤에서 그녀를 감싸안은 채 잠들었다.
예우미는 한없이 굳은 몸으로 그 품에 갇혀 있었다.
눈물은 소리 없이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지쳐서 겨우 눈을 감았다.
새벽녘, 눈을 떴을 때 그의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예전에는 늘 궁금했다.
왜 정이현은 단 한 번도 그녀와 함께 등교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았다.
밤마다 그녀 곁에 있던 남자는 정윤재였고 낮의 정이현은 애초에 그녀에게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예우미는 무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녀는 퇴학 절차를 밟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교무처로 가기도 전에, 한 여학생이 급히 달려왔다.
“예우미! 여기 있었구나! 교수님이 찾으셔. 지금 바로 연구실로 오래!”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예우미는 천천히 교수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예상대로 그곳에는 박경하가 있었다. 그녀는 얄미울 정도로 단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예우미를 보자마자 입가에 미세한 비웃음이 스쳤다.
교수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예우미, 박경하! 이 두 논문이 왜 이렇게 똑같지? 문장 구성부터 맞춤법 오류까지 완벽히 일치해! 학문에서 도덕이 먼저야! 누가 베꼈는지 지금 당장 솔직히 말해. 자백하면 학교에서 선처할 수도 있어.”
박경하가 곧장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교수님, 제 논문은 제가 직접 쓴 거예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정말이에요, 저는 베낀 적 없어요.”
예우미는 눈앞의 논문 두 개를 바라봤다.
그건 분명 자신이 쓴 글이었다.
“선생님, 제 논문도 제가 직접 쓴 겁니다. 베낀 적 없습니다.”
교수는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둘 다 자기 거라면, 증거는?”
그 순간, 박경하가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 저는 증인이 있습니다.”
탁.
그때, 교수실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정이현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