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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매칭 결과 나왔어요?” “네, 일치합니다.” 병실 밖, 주치의가 창문 너머로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깡마른 몸과 핏기 하나 없는 여자의 모습에 결국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사모님께서는 선천적인 심장병 외에도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고 계십니다. 골수 기증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상태에요.” 남자는 손에 든 보고서를 덮으며 병실을 힐끔거렸다. 무미건조한 눈빛에는 티끌만큼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심장이 안정된 지 벌써 1년 넘었잖아요. 앞으로 한 달 동안 발작만 없으면 골수 기증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최지유가 골수 이식을 받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는 이제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사이에 손아윤의 빈혈 증세는 영양 보충을 조금만 해주면 그만일 터였다. 의사는 그의 말에 안경을 고쳐 쓰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문밖에서 오가는 대화는 손아윤의 귀에 모조리 흘러 들어왔다. 죽은 듯 고요하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재생불량성 빈혈, 그것은 이미 그녀의 골수가 제 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최지유에게 이식해주기 위해 자기 골수를 뽑아내려 하고 있다니. 최지유를 향한 지극한 순애보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오만한 착각을 비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철컥. 이때, 병실 문이 열렸다. 짙은 색상의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한테서 절제된 권위가 느껴졌다. 냉정하고 흐트러짐 없던 얼굴에는 평소 보기 드문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했겠지만, 이제는 마음이 죽은 물처럼 고요하여 아무런 파동도 일지 않았다. 남자는 침대 가장자리에 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칠흑같이 어둡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의 왼쪽 손목에 감긴 붕대를 훑어보았다. “내가 말했을 텐데. 자살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네, 그렇더라고요.” 손아윤은 오른손을 들어 칼날에 베였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문질렀다. “우리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 부부 목숨까지 앗아간 사람을 두고 어떻게 마음 편히 죽겠어요? 안 그래요?” “윽!” 남자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 들어 올렸다. 손아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싸늘한 눈동자로 냉기가 감도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방금 네가 한 말 똑똑히 기억해. 내 허락 없이 죽지 마.” 그녀를 살려두려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자기 심장과도 같은 여자를 살릴 골수가 필요해서였다. 물론 죽기 싫은 건 자신도 매한가지였다. 반드시 살아남아 증거를 찾아내 눈앞의 남자를 제 손으로 감옥에 처 낳아야만 했으니까. 2년 전, 손명 그룹은 갑작스러운 자금줄 차단으로 위기를 맞았다. 서경시 전체를 통틀어 대출해 주겠다는 은행이 단 한 곳도 없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가문들조차 이 일로 그들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모임에 참석한 새언니 백다인이 최씨 가문에서 기꺼이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대신 내건 조건이 바로 두 집안의 정략결혼이었다. 최명철 슬하에는 혼기가 찬 아들과 손자가 한 명씩 있었으나 둘 다 미혼이었다. 최주원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결국 그녀의 짝으로 아들인 최하준을 낙점했다. 하지만 일주일 뒤, 최하준은 귀국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는 불행이 닥쳤다. 최명철은 어쩔 수 없이 대상을 변경해 최주원을 다시 내세웠다. 이상한 점은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집안의 약혼이 성사되자 손명 그룹의 위기도 해소되었다. 최주원은 그녀를 끔찍이 아끼고 보살폈다. 지극정성인 모습에 사람들은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모님과 오빠도 안심하고 그에게 맡길 정도였으니. 심지어 자신조차도 그를 평생 함께할 동반자로 받아들였다. 6개월 후,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하지만 예식 당일, 새언니 백다인이 최주원과 최씨 가문 양녀인 최지유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그 사실을 메시지로 알린 직후, 그녀는 호텔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병원으로 향하던 부모님과 오빠 역시 불행히도 교통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경찰은 이 일련의 사건들을 단순 사고로 결론지었다. 가까스로 회복세에 접어들었던 손명 그룹의 주가는 다시 한번 처참하게 곤두박질쳤다. 이 틈을 타 큰아버지 손허웅이 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했다. 석 달 뒤, 최명철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최주원이 최강 그룹을 물려받았다. 그녀는 최씨 가문 저택에 감금되었고, 일거수일투족을 경호원과 도우미들에게 감시당했다. 그러다 한 달 전, 사설탐정으로부터 한 가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손허웅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최주원이라는 걸. “그럼요,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예요.” 반드시 살아남아서 증거를 모아 기필코 그를 감옥에 처넣고 말리라! 손아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최주원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적나라한 증오를 읽어냈다. 이내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초조함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 말이 진심이길 바라지.” “대표님, 지유 아가씨가 깨어났습니다.” 최씨 가문 도우미 장은심이 어느새 문밖에 나타났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한순간에 깨어졌다. 최주원은 그녀의 턱을 놓아주고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리했다. 이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자살 소동 때문에 지유가 충격을 받았어. 괜한 걱정 안 하게 너도 같이 가서 얼굴 비춰.” 손아윤은 손목의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입가에 걸린 조소는 더욱 짙어졌다. 사실 과도에 묻은 이물질을 소매로 닦으려 했을 뿐인데, 최지유가 가증스럽게 말리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실수로 손목을 그어버린 것이었다. 정작 피를 흘린 자신은 멀쩡했고, 오히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발치에 까무러쳤다. 가련한 척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 ‘여우짓’은 이제 드라마에서도 신물이 날 만큼 진부한 설정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누군가는 그 유치한 수작을 따라 하고, 더 기막힌 건 명석하기로 이름난 남자가 저급한 연기에 눈먼 채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꼴이라니. “정말 괜찮겠어요? 내가 가서 그 여자 숨통이라도 끊어놓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만 있다면 지금 못 할 게 없거든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최주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분노 때문이었다. “손아윤, 잊지 마. 지유가 아픈 건 전부 너희 집안 탓이야. 네가 응당 갚아야 할 빚이라고.” 애당초 손씨 가문 사람들이 제멋대로 결혼 상대를 확정하기도 전에 두 집안의 혼사 소식을 퍼뜨렸다. 최지유는 상대가 당연히 최주원일 거라 오해했고, 그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몰래 빠져나갔다가 결국 치료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할아버지께서 왜 최강 그룹을 당신 작은 삼촌에게 물려주려 하셨는지 이제 알겠네요. 그 머리로는 여자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손아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고, 눈동자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최하준을 언급하는 순간, 최주원의 무심한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식물인간일 뿐이지.”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의기양양한 표정은 손아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최하준의 교통사고도 당신이 꾸민 짓이죠?” 미인과 천하, 그는 둘 다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최주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라앉은 눈빛으로 침묵했다. “정곡을 찔렸나 보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비웃었다. 이내 말을 이어갔다. “고작 여동생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예요?”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서늘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향했고, 무엇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뚫어지게 응시했다. “지유한테 맞는 골수 기증자를 간신히 찾았는데, 그때의 소동 때문에 상대가 마음을 돌렸어. 남의 행복을 짓밟아 놓은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모든 걸 다 누리며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손아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최주원이었다니! 최하준의 사고 이후, 최명철은 충격으로 몸져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마치 짜인 각본처럼 이어진 비극의 끝에서 그는 마침내 왕좌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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