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최지유는 병이 재발하여 응급실에 실려 갔고, 수차례 위독 통보받았다.
최주원의 서슬 퍼런 분노에 기증자들을 감시하던 부하 직원은 제 살길을 찾기 위해 그녀를 언급했다.
“사모님께서 Hh 혈액형이라고 하던데, 이는 만능이라고 들었어요. 혹시 골수도 최지유 씨와 일치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날 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최주원이 직접 본가로 찾아와 그녀를 데려갔다.
당시 주치의였던 제인은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지, 실상을 알려준 뒤 몰래 병원 밖으로 빼내 주었다.
그녀는 손씨 가문 별장으로 돌아와 어릴 적 오빠와 놀던 비밀 아지트에서 몸을 숨긴 채 꼬박 석 달을 버텼다.
밤이 깊어 주위가 고요해지면 몰래 기어 나와 먹을 것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비밀 아지트에서 나오던 날,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아 기절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최씨 가문 본가로 끌려온 뒤였다.
결국 그녀를 감시하는 인원은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석 달 동안 부실하게 먹은 데다 장기간 이어진 공포 속에서 제대로 잠조차 이루지 못한 탓에 몸은 어느새 반쪽이 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걸어 다니는 해골과 다름없었다.
주치의였던 제인은 이미 교체된 상태였다. 새로 온 의사는 그녀의 몸 상태를 먼저 회복시킨 후에 골수 일치 검사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첫 한 주일 동안은 음식을 완강히 거부했다.
몇 번이나 저혈당으로 쓰러지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최주원은 아예 본가에 눌러앉아 석 달 넘게 머물렀다.
단지 그녀가 제대로 먹고 기력을 회복하는지 제 눈으로 직접 감시하기 위해서.
손아윤은 최지유가 이 모든 상황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최명철의 기일, 최씨 가문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본가로 모여들기 전까지는.
조카뻘 되는 이의 입을 통해 최주원이 석 달간 출장을 떠났었다는 ‘괴담’ 같은 이야기를 듣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둘이 함께 석 달을 지냈다는 사실을 외부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 최지유조차도.
이제 그녀의 골수를 뽑아 최지유를 살리려 하면서도 그 사실만큼은 숨기려 하고 있었다.
손아윤은 속으로 피식 비웃었다.
좋은 일이란 일은 인륜을 저버린‘가짜 남매’가 다 독차지할 기세였다.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주원이 최고급 의료진을 붙여줬다며 으스대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손아윤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끼어들었다.
“반드시 성공할 거야. 누군가 너 대신 저승길을 가줄 거라.”
“저승길?”
최지유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빠, 나 때문에 사람 다치게 하면 안 돼요.”
“지유야, 그런 일 없으니까 진정해.”
최주원은 그녀를 품에 안고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손아윤을 쏘아보며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최지유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오빠가 정말로 무고한 사람을 해치려는 거라면 난 차라리 치료 안 받을래요.”
최주원이 고개를 숙였다. 애틋한 시선은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수술은 신경 안 써도 돼.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절차니까. 안심하고 몸조리나 해, 넌 반드시 완치될 거야.”
최지유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요?”
“응.”
최주원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던 찰나,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구경만 하는 손아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내 허공에 멈춘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주머니, 지유 좀 잘 보살펴주세요.”
“네.”
장은심이 앞으로 나서자 최주원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오기도 전에 손아윤은 휠체어의 작동 버튼을 눌러 한발 앞서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코너를 돌 무렵, 결국 최주원에게 가로막혀 멈춰 서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살기가 일렁이는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비아냥거렸다.
“최지유 살리겠다고 본가에서 나랑 석 달이나 억지로 먹고 자고 버텼으면서, 정작 본인한테는 비밀이라니요. 나중에 완치돼서 딴 놈한테 시집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남 좋은 노릇만 시키는 자선 사업이라도 하려는 건가?”
최주원은 휠체어 팔걸이를 잡고 천천히 몸을 숙여 칠흑 같은 눈동자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지유는 진심으로 너를 좋아해. 네가 기증했다는 사실을 알면 절대 수술 안 받겠다고 할 거야.”
사람은 기가 막힐 때 웃음이 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손아윤은 픽, 실소를 흘렸다.
“아, 그래요?”
그녀도 자신들처럼 어릴 적부터 인류애를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거로 생각하나?
“우정이든 사랑이든, 당신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야 최지유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저런 무지한 소리를 내뱉을 리 없었다.
최주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머물렀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손아윤은 버튼을 누른 다음 뒤로 물러나며 그를 지나 유유히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찰나, 커다란 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먹물을 머금은 듯 깊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쳤다.
“링거 맞으니까 입안이 쓰네요. 얼른 내려가서 물 좀 마시고 싶어요.”
최주원은 수액병을 확인했다. 자그마한 병은 이미 절반이 비어 있었다.
“금방이면 돼.”
그가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발을 끼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건만 간단히 하시길.”
손아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은 티를 냈다.
“방금 하던 얘기 말인데, 사랑받는다는 게 정확히 어떤 느낌이라고 생각해?”
손아윤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더니 덤덤하게 대답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니 정답은 없겠죠.”
띠띠띠.
엘리베이터 문이 오랫동안 닫히지 않자 경고음이 울렸다.
최주원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나자 비로소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는 왼손을 들어 문 사이로 뻗었고,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불빛을 받아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거봐, 네 입으로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다고 했잖아. 그런데 무슨 근거로 지유가 널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단정 짓는 거지?”
어쨌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자기 경험을 빗대어 답하는 줄 알았더니, 그는 단지 최지유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최주원이 사랑받아 본 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최지유를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보아냈다.
심지어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그녀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만점짜리 답변이네요. 이제 엘리베이터 문 좀 닫아주실래요?”
등 뒤로 엘리베이터 경고음을 듣고 점검하러 온 간호사가 보였다.
하지만 최주원의 VIP 신분 때문에 차마 나서지 못한 채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며 복도 모퉁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저... 엘리베이터가...”
최주원이 천천히 발을 뗐다.
뒤로 물러날 줄 알았던 손아윤의 예상과 달리 그는 한 걸음, 두 걸음 앞장서더니 아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남자를 훑어본 뒤, 휠체어 바퀴의 버튼을 눌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도 휠체어를 탄 그녀가 앞서가고 최주원이 뒤를 따랐다.
병실 문 근처에 다다랐을 때, 손아윤이 갑자기 멈춰 섰다.
“여기까지면 됐으니까 이제 당신이 극진히 아끼는 그 사람한테나 가 봐요.”
지금은 그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이었다.
“괜히 지유한테 우리 결혼 생활에 문제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아. 쓸데없는 걱정할지도 몰라.”
무심한 말투는 마치 업무라도 지시하는 듯했다.
손아윤은 마음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최지유가 당신 몸에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놨대요? 아니면 천리안이라도 있대요? 시간 때울 곳도 많으면서 왜 자꾸 내 눈앞에서 얼쩡거려요?”
서늘한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멀쩡히 제사를 지내다가 난데없이 손목을 그였을 때부터 이미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터였다.
그런데 가짜 남매까지 세트로 설쳐 대니 똥이라도 씹은 듯 불쾌했다.
최주원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병실 예약도 비용 지급도 다 내가 했는데, 여기 있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지. 보기 싫으면 눈 감고 잠이나 자든가.”
말을 마치고는 긴 다리로 그녀를 지나쳐 병실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 버렸다.
손아윤은 그냥 돌아가고 싶었지만, 입안에 맴도는 약 기운이 지독하게 썼다.
소파 탁자를 보니 물병은 비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손목을 다치는 바람에 휴대폰조차 병원에 챙겨 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고개를 돌려 안내 데스크를 봐도 정수기는 텅 비었고, 간호사 역시 어디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