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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듣기로는 모든 남자의 마음속에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숨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강유진은 하재호만큼은 예외일 것이라 믿었다. 어쨌든 자신과 그는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으로 이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거대한 첫사랑의 무대와도 같은 곳이었고 하재호 역시 그 흔한 운명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강유진은 열여덟 살부터 하재호와 함께했고 벌써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천여 일의 낮과 밤을 함께하며 가장 친밀한 순간들까지 나누었지만 끝내 남자의 청춘에 스쳐 간 한순간의 두근거림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칠 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남자의 마음조차 온전히 알지 못했다니 강유진은 되새길수록 우스웠다. 첫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마음속 깊이 묻어둔 채 수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강유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순간, 온 힘을 쏟던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꾸짖었다. “딴생각하지 마.” 하재호는 침대 위에서 언제나 거칠고 격렬했다. 그러다 그만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검은 비단 상자를 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서둘러 손을 뻗어 아래에 깔린 강유진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 급히 상자를 붙잡았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는지 하재호는 드물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게 뭐야?” 강유진은 담담히 상자를 빼앗아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던지고는 하재호의 목덜미를 감아올리며 낮게 속삭였다. “왜 다른 데에 신경 쓰고 그래요? 나한테 질린 거예요?” 하재호는 결국 그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욕망에 빠져들었다. 그 광란의 순간에도 강유진의 시선은 옆에 내버려진 검은 상자를 향했고 그녀의 눈가는 서서히 젖어 들었다. ‘하재호, 당신은 아마 평생 알지 못하겠지.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 한 달 전. 프라임캐피탈이 성공적으로 상장하자 하재호의 지인들이 작은 축하 연회를 열어주었고 강유진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참석했다. 그날 강유진은 이 자리를 빌려 하재호에게 청혼하리라 마음먹었다. 원래라면 남자가 해야 할 일이었겠지만 강유진은 그를 너무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라면 그깟 자존심과 체면쯤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날을 위해 그녀는 무려 칠 년을 기다려왔다. 하재호를 위해 강유진은 자신의 길을 바꾸었다. 좋아하던 전공을 버리고 그가 원하던 금융을 택했다. 해외 명문대의 입학 제안도 포기한 채 프라임캐피탈에 들어가 그의 곁을 지켰다. 말단 직원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올라 결국은 비서실장 자리까지 올랐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는 오직 강유진만이 알고 있었다. 한창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강유진은 하재호에게 자신과 결혼할 것이냐고 수없이 묻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선물과 사랑은 손 내밀어 구하는 것이 아니라던 어머니의 말 때문이었다. 스스로 주는 건 편애겠지만 손 내밀어 받는 건 시혜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게다가 하재호는 사랑을 쉽게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의 곁에는 언제나 강유진뿐이었고 다른 여자는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둘 사이의 결말은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 당연함을 위해 강유진은 온몸을 던져 프라임을 위해 뛰었다. 작은 일, 큰 일을 가리지 않고 숱한 술자리에 끌려다니며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술에 찌든 몸으로 유산까지 겪었을 때는 수술대 위에서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때 친구 신하린이 물었다. “죽다 살아났는데 아직도 후회 안 돼? 남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망가져도 괜찮아?” 강유진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럴 만해.” 신하린은 그녀에게 ‘사랑을 위해서라면 직진만 하는 전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했다. “네가 누구한테도 지지 않기를 바랄게.” 그때 강유진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하재호는 날 절대 지게 하지 않아.” 그 믿음 하나로 강유진은 프라임 상장까지 버틸 수 있었다. 프라임이 상장하는 날, 하재호가 강성에서 종을 울리던 순간 강유진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방에 틀어박혀 한바탕 펑펑 울었다. 눈물을 닦고 마음을 다잡은 뒤 강유진은 청혼으로 하재호에게 서프라이즈를 선물할 준비를 했다. 여자로서 청혼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재호는 너무 바빴고 상장 이후에도 새로운 프로젝트가 쏟아져 축하 파티와 사업 관계자들의 인사로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강유진은 자신이 직접 프러포즈하는 것이 결국 그를 돕고 짐을 덜어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결전의 순간을 앞두자 강유진의 가슴은 터질 듯 두근거렸다.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며 떨리는 손을 매만졌다. 혹여 아직 입도 떼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둔 청혼의 맹세조차 목이 메어 삼켜버릴까 두려웠다. 문 안쪽에서는 술자리가 한창이었고 왁자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형, 요즘 노윤서랑 연락해?” “노윤서? 그거 형 첫사랑 아니야? 갑자기 그 얘긴 왜?” “노윤서가 곧 귀국한대.” “그래? 그러면 형 다시 만날 수 있겠네? 첫사랑과 재회라니 낭만적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설렘으로 떨리던 강유진의 손이 순간 굳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노윤서 아버지가 요즘 승승장구하잖아. 형이 만약 노윤서랑 결혼하면 형에게도 그렇고 프라임에도 득이 클 거야. 게다가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리거든.” “그리고 형한테는 잊지 못할 첫사랑이잖아. 사랑과 성공을 한꺼번에 잡는 거지.” 그 말을 한 사람은 하재호의 오랜 친구 서태우였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그의 말은 농담 같아도 무게가 있었다. ‘하재호에게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고?’ 강유진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면 강유진은 어떡해? 그래도 형 곁에서 오래 버텼잖아. 공은 없어도 고생은 많았을 텐데.” 서태우는 코웃음을 쳤다. “돈 좀 쥐여주면 되지. 아니면 결혼한 뒤에도 옆에 두면 되잖아. 뭐, 다들 그렇게 살아. 집에는 본처 밖에는 애인.” 문밖에서 듣고 있던 강유진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제발 하재호가 모두의 앞에서 아니라고 부정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가 사랑하는 건 강유진이고 결혼할 여자도 강유진이라고.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린 끝에 돌아온 것은 건조한 한마디뿐이었다. “언제 이렇게들 수다스러워졌어?” 부정도, 반박도 없었다. 오히려 인정하는 듯 들렸다. “그래, 그래. 좋은 날인데 좀 자극적인 얘기 하자. 술 먹다 잠들겠네.” 서태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분위기를 띄웠다. 평소 여자를 옷 갈아입듯 바꿔대는 그는 별의별 경험을 다 겪어본 듯했다. “다들 제일 자극적인 경험 하나씩 말해보는 거 어때?” “차에서.” 누군가의 대답에 서태우는 비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게 뭐가 자극적이야?” “고속열차 안에서.” 순간 술자리가 떠들썩해졌다. “와, 너 제법인데!” 서태우는 그 기세로 옆에 앉은 하재호를 부추겼다. “형, 형은 뭐 없어? 제일 자극적인 경험?” 하재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랑 때문에 삼자가 된 거.” 순간 방 안이 술렁거렸다. 강성 최고 재벌가의 후계자에, 손만 뻗으면 세상 모든 여자를 가질 수 있는 하재호가 사랑 때문에 스스로 제삼자를 자처했다니 놀라울 만도 했다. 진심이 아니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태우가 가장 격하게 반응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커서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강유진의 고막이 떨릴 지경이었다. “노윤서 맞지! 역시 형, 아직도 노윤서를 좋아할 줄 알았어! 그때 형이 노윤서를 좋아했지만 노윤서는 서동민을 좋아했잖아. 그래서 그저 삼자가 되기로 한 거 아니야! 형 진짜 순정파다!” 그 웃음소리, 그 야유가 차가운 얼음물처럼 강유진의 온몸을 덮쳤다. 위가 뒤틀리며 견딜 수 없는 통증에 그녀는 서서히 웅크려 앉았다. 그 사이에도 서태우는 떠들어댔다. “형, 솔직히 말해. 10월 10일에 노윤서 만난 거 맞지?” 하재호가 되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날 노윤서가 인스타에 올렸잖아. 재회만큼 낭만적인 건 없다. 딱 보니까 형을 만난 것 같더라. 그날 뭔가 진전이 있었지? 마른 장작에 불붙은 것처럼 단번에 다시 이어진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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