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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자료를 다 나눠주고 돌아서자 노윤서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하필 그녀가 앉은 자리는 강유진이 늘 앉던 자리였다. 흠칫하던 강유진이 뭐라 하려던 찰나, 하재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는 그쪽에 앉아.” 노윤서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가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게 많아요. 재호 곁에 있으면 물어보기도 편할 것 같아서요.” 이미 하재호가 말을 꺼낸 뒤였기에 강유진은 더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서류를 정리한 뒤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회의실 안은 숨소리마저 억눌린 듯 조용했다. 그러나 강유진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며 그 눈길 속에는 짙은 동정이 서려 있었다. 그 동정은 오히려 그녀를 바늘처럼 찌르는 듯했다. 회의가 절반쯤 진행될 무렵 하재호가 한 프로젝트를 두고 날카롭게 물었다. “이 프로젝트 왜 아직도 진행이 안 됐지? 담당자가 누구야?”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쾌감이 담겨 있었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금세 하재호가 화가 났음을 눈치챘다. 순간 공기는 얼어붙을 만큼 차가워졌고 강유진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맡은 프로젝트입니다.” 하재호의 차가운 눈빛이 곧장 그녀를 향했고 목소리는 한층 매서웠다. “변명해 봐.” “죄송합니다. 며칠 전 병이 도져서 일정이 조금 늦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하재호가 끊어버렸다.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어. 개인적인 일로 회사 일에 지장을 주는 건 기본에 어긋나는 일이야. 이건 규칙이라고!” 강유진은 고개를 떨군 채 잠시 침묵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맞추도록 할게요.” 그제야 하재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벨루나에서 노 이사 환영 자리를 마련했으니 다들 참석하세요.” 벨루나는 강성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회원제 클럽으로 한번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큰돈이 드는 곳이었다. 그의 말에 모든 직원은 하재호가 노윤서를 얼마나 특별히 대하는지 알아챘다. 순진한 주채은조차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회의실을 정리하며 강유진에게 속삭였다. “언니, 괜찮아요?” 강유진은 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근데 언니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주채은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강유진은 무심히 손으로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티 나?” 주채은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요.” 강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위가 좀 안 좋아서 그래. 원래 있던 병이야.” “그러면 오늘 환영회는 안 가는 게 낫지 않아요?” 잠시 생각한 끝에 강유진은 말했다. “안 가는 게 맞겠네. 나 대신 하 대표님께 말씀 좀 전해 줘.” 전 직원이 참석하는 자리이니 자신이 있든 없든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의 하재호라면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요. 언니는 집에 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몸부터 챙기셔야죠.” 주채은은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채은조차 그녀의 상태를 알아챘는데 수년간 함께 했던 하재호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예전에는 자신을 스스로 속이며 그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라 합리화했지만 지금은 그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위는 더욱 쓰라렸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강유진은 진통제를 삼키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퇴근 후, 겨우 집에 돌아온 강유진은 침대에 몸을 웅크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이 지독한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몸이 조금 진정되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이라도 제대로 자면 조금 나아지겠지.’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달랬다. 그러나 막 잠든 순간 익숙한 전화벨이 울렸다. 그 소리는 오직 하재호에게만 설정된 전용 벨 소리였다. 한때는 그 소리만으로도 가슴이 뛰었지만 지금은 고문처럼 느껴졌다. 강유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재호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고 전화를 한 번 받지 않으면 두 번은 걸지 않는다는 것을 강유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전화가 또 울렸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유진은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 평소와 전혀 다른 말투에 하재호는 눈살을 찌푸리고 화면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어디야?” “몸이 안 좋아서 못 가겠어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전화기 너머에서 노윤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호야, 강 비서님 안 온대?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든 건가?” 이어 하재호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유진, 비싼 척 좀 하지 마. 회사 직원들 다 왔어. 네가 뭐라고 참석 안 해?” “그게 아니라...” “이십 분 안에 와. 아니면 더는 회사 나올 필요 없어.” 하재호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참 동안 멍하니 휴대폰을 쥐고 있던 강유진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단지 환영회에 불참했을 뿐인데 그토록 흥분하며 회사에 나오지 말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지난 세월 쏟아부은 노력과 희생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프로젝트를 위해 술을 마시고 아픈 몸을 견뎠던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강유진이 벨루나에 도착했을 때 룸 안 분위기는 이미 한창 달아오르고 있었다. 서태우가 목청을 높여 하재호와 노윤서에게 러브샷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재호의 목소리는 아까 전화할 때와 달리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장난치지 마.” “형, 이렇게 시시하게 놀 거야? 놀러 나왔으면 마음껏 즐겨야지. 우리 전부 다 마셨는데 형만 빠지면 재미없잖아.” 하재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노윤서가 먼저 잔을 들어 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재호야, 그냥 게임일 뿐이잖아. 좀 맞춰줘. 안 그러면 내가 곤란하잖아.”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하재호도 잔을 들었다. 그리고 노윤서가 하재호의 팔에 자연스레 팔짱을 끼는 순간 하재호의 시선이 문가에 서 있던 강유진과 마주쳤다. 그러나 잠깐이었고 곧 그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고 노윤서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잔을 맞부딪쳤다. 서태우는 흥에 겨워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다 실수로 노윤서를 앞으로 밀쳤다. “조심해.” 찰나의 순간 하재호가 반사적으로 노윤서를 끌어안듯 붙잡았다. 둘은 그대로 서로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순간, 룸 안의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유진의 가슴은 이상하게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아니, 아픔조차 무뎌진 것 같았다. 대신 속이 요동치며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문득 터져 나온 주채은의 놀란 목소리가 뜨거운 분위기를 깨뜨렸다. “유진 언니! 몸이 안 좋다고 하셨잖아요. 왜 나오셨어요? 집에서 쉬셔야죠!” 그 걱정은 방 안의 열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뜨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노윤서는 하재호의 품에서 몸을 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강 비서님, 드디어 오셨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요.” 강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들어섰다. 순간 자신이 너무 과했나 싶어 양심에 찔리던 서태우가 몇 마디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찰나, 하재호가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늦었으면 석 잔 정도는 마셔야지. 그래야 성의가 있지 않겠어?” 술을 마시라는 말에 강유진의 위장이 격렬히 뒤틀리며 불길처럼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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