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여보,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손태하는 순간 깜짝 놀라 손끝이 떨렸다.
‘설마 진짜로 내 말을 듣고 있었던 건가? 이런...계속 자기야, 여보야, 손발이 오그라들게 부르고 있었는데... 민망해서 어떡하지?’
“음... 저기... 누나, 혹시 내 목소리 들리는 거야?”
당황한 그는 급히 호칭을 ‘여보’에서 ‘누나’로 바꿨다.
‘누나라고 부르면 뭐라 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가장 안전한 선택이겠지?’
“누나, 누나...”
손태하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쥔 채, 나지막이 몇 번이나 불러봤다. 하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양지유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우연히 손에 힘이 들어간 거였나. 단순한 반사일 수도 있고...’
그는 살짝 긴장을 풀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여보, 방금 진짜 깜짝 놀랐어. 정말로 깨어난 줄 알고 내심 기대했거든.”
그는 다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지금도 당신이 눈을 떴으면 좋겠어. 근데 한편으론, 당신이 정말 깨어났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손태하는 혼잣말하듯 너무나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기야, 분명히 깨어나면 이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하겠지? 난 그저 돈 주고 사 온 제물에 불과하니까...”
말을 마친 그는 문득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엔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
‘그냥 계약 결혼일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지유 씨 옆에 있는 시간이 익숙해져 버렸나 봐...’
...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 한 시가 되었다.
“여보, 나 아직 점심도 못 먹었어. 잠깐 나가서 밥 좀 먹고 올게. 그동안 잠깐이라도 깨어나서 밥도 먹고 창밖도 보고...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야 얼른 회복하지.”
“알겠어. 잔소리는 여기까지. 자기야, 밥 먹고 올 테니까 이따 봐...”
손태하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병실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오후 내내 그는 다시 병실에 들러 양지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손을 잡고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옆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여보, 나 내일부터 출근이야. 병원 근처에 있는 패션 브랜드 회사에 다니게 됐어. 회사랑 여기랑 가까워서 점심시간에도 잠깐 들를 수 있을 거야. 퇴근하고 나서도 올 테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나 이제 가볼게. 내일 또 올게...”
손태하는 양지유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병실을 나섰고, 곧장 새로 이사한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야, 너 대체 어디 갔다 온 거냐? 아침에 나가더니 이제야 들어오고... 병문안이 아니라 간병 일 하는 거 아니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윤재형이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손태하에게서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친척분이 너무 적적해하시니 말동무 해드리다가 온 거야. 의사 말로는 대화가 회복에 도움이 된대.”
“흠... 다른 가족은 없어? 너 요즘 맨날 병원 가잖아. 솔직히 좀 힘든 거 아니야?”
윤재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응... 가족이 없긴 하지.”
손태하는 말을 아꼈다. 양지유와의 관계를 지금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래? 야, 근데 너 진짜 고생이 많다.”
“괜찮아. 친척이고... 어떻게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손태하는 슬쩍 웃으며 말한 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야, 재형아. 오늘은 내가 쏜다. 맛있는 거 먹고 한잔하자.”
1억이 넘는 돈이 통장에 들어와 있으니, 이 정도 사치는 괜찮았다
“진짜? 너 갑자기 왜 이렇게 멋있어졌냐?”
“하하...”
“얼른 가자, 출발!”
두 사람은 웃으며 옷을 챙겨 입고 함께 집을 나섰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집 근처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에 들어섰다.
간단하게 안주 두 가지와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내일은 첫 출근이라 많이 마시기는 부담스러웠다.
두 사람 모두 적당히 한두 잔 정도로 목을 축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
술 한 잔 가득 따라 들고는 윤재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한숨이야?”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들이켰다.
“민지영 때문이지... 하 진짜...”
“지영이? 너희 요즘 잘 만나고 있다며? 네가 강성에 남은 것도 걔 때문 아니었어?”
윤재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에 술을 따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제 그러더라고. 결혼할 생각이면 강성에 신축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 한대. 그리고 예물도 1억은 준비해야 한다고... 지금 갓 졸업한 내 처지에 그게 말이 돼?”
윤재형은 두 번째 잔도 단숨에 비웠다.
“강성에서 30평짜리 아파트 하나 사려면 4억은 줘야 해. 내 전 재산 탈탈 털어도 그 반도 안 되는데... 지영이는 딱 잘라 말했어. 앞으로 2년 안에 그걸 준비하면 결혼하는 거고, 못할 것 같으면 그냥 끝내자고...”
“...”
윤재형의 말을 들은 손태하는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2년에 4억이라... 1년에 2억, 한 달에 2천만 원... 그것도 세후로? 이제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무슨 수로 그 돈을 벌어? 그 조건을 진심으로 내세운 거라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지.’
“휴...”
윤재형은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진짜 연애 왜 했나 몰라. 애초에 애인이 없었다면 이런 스트레스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잖아. 너처럼 혼자 사는 게 최고야. 내가 괜히 연애해서...”
“난...”
손태하는 말끝을 흐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지금 혼자인 줄 아냐? 이미 유부남이거든? 아내가 병원에 누워 있다고... 비록 병원비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고 생활비 걱정도 없지만, 그래도 나도 마음에 걸리는 게 많단 말이야...’
“재형아, 잘되면 천생연분인 거고, 안 되면 사랑 한번 치열하게 배운 셈 쳐.어차피 네가 마음 준 민지영도 곧 남의 여자가 될지도 모르는 거잖아. 이미 마음 줬고 몸도 섞었으면 그냥 인생이 너한테 연애 학점 하나 준 거로 생각해. 사랑이란 게 원래 좀 아픈 거잖아. 한두 번 다치고 나면 철도 드는 거니까.”
손태하는 말하다 말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말이야... 네 말이 그럴듯하긴 한데 난 이미 지영이를 내 여자로 만들 거라고 마음먹었거든. 만약 우리가 끝까지 못 가면 진짜로 다른 놈한테 뺏기는 거잖아. 그 생각만 하면 진짜 숨이 턱 막혀.”
“음...”
윤재형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진짜 부부 되려면 4억이라는 벽부터 넘어야 하잖아?’
“4억 원이라는 벽을 무슨 수로 넘어? 네 체격으로는 나가서 몸이라도 팔아봤자 하루에 몇 푼이나 벌겠냐...”
윤재형은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차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차라리 잘생긴 친구 덕 좀 보자. 네가 재벌가 사모님 한 분 꼬셔 봐. 성공하면 친구 좀 도와주고. 우리 의리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