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회사에서 나온 후 손태하는 바로 정문 앞에서 3번 버스를 탔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병원에 도착했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곧장 중환자실 쪽으로 향했다.
이젠 병원에서도 손태하는 제법 유명 인사였다. 지나가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그를 보면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6번 병실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 있는 양지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간호사 한 명이 서서 차트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네, 간호사 선생님. 오늘부터 출근했거든요. 방금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달려왔어요.”
사실 그는 만두 하나 살 겨를도 없이 바로 이곳으로 왔다. 배는 고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너무 짧으니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서였다.
“아이고, 회사 다니면서 병간호까지 하시려면 참 힘드시겠어요.”
“괜찮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손태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침대 곁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익숙한 듯 양지유의 손을 조심스레 감쌌다.
“오...”
양지유의 작은 손은 전보다 훨씬 따뜻했다.
“간호사 선생님, 제 아내는 오늘도 깨어났었나요? 식사는 했을까요?”
“네, 손태하 씨. 오늘 오전에만 두 번 깨어나셨어요. 식사도 어제보다 훨씬 잘 드셨고요. 눈빛도 확실히 더 또렷해졌어요.”
“정말요?”
기쁜 소식에 손태하의 눈빛이 반짝였다.
“혹시... 말도 했어요?”
“아직 말은 없었지만 저희가 하는 말은 확실히 잘 알아들으시더라고요. 음식을 챙겨드릴 때도 스스로 입도 벌리시고요. 이대로만 가면 며칠 안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진짜 곧 회복되는 거네요...”
‘이 누나 진짜로 좋아지고 있나 봐...’
순간, 손태하의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기분 좋으시죠? 우리 양지유 환자가 워낙 미인이잖아요.”
간호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속으론 이런 생각도 하고 있었다.
‘예쁘긴 정말 예쁘다만... 나이 차가 아들뻘이지. 이 커플... 뭔가 잊을 수 없는 조합이네. 근데 양지유 환자가 깨어나도 이 결혼이 계속 유지될까? 왠지 곧 파혼 각인데...’
“네, 예쁘긴 하죠. 진짜...”
손태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등을 감돌던 온기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양지유의 손이 천천히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간호사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전 이만 나갈게요.”
차트를 정리하던 간호사는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손태하는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한 뒤,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기야... 지금 내 말 들려? 오늘 첫 출근이었어.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 참, 회사 이름은 루벨르 그룹이야. 알아? 꽤 큰 회사더라.”
“...”
‘혹시라도 방금 말을 들은 걸까?’
손태하가 속삭이듯 말하자 양지유의 손이 살짝씩 움직였다.
“자기야... 혹시 지금... 깨어나려는 거야?”
놀란 듯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살짝 열이 오른 그녀의 뺨은 눈에 띄게 더 붉어져 있었고 손끝에 닿는 감촉도 더 따뜻했다.
입술 그리고 목선을 따라 내려가며 그의 손길은 아주 천천히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올랐지? 이건... 마치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그는 순간 숨을 삼켰다.
“여보... 나도 당신이 눈 떴다는 소식 들었어. 근데 이상하게도... 난 한 번도 그 순간을 못 봤네. 이렇게 매일 오는데도 말이야. 좀 서운하잖아. 오늘은... 나랑도 눈 한 번 마주쳐 줄래?”
그는 낮게 웃으며 쇄골을 이어 어깨까지 부드럽게 만졌었다.
그리고 조금 더 아래로 손이 옮겨지다 그녀의 쇄골 바로 아랫부분에 닿았다.
순간 양지유의 숨결이 평소보다 조금 더 짧고 가빠졌다.
볼은 더 붉게 물들었고 미세하게 가슴도 오르내리고 있었다.
‘설마... 지금 이 반응은... 그냥 무의식적인 생리 현상은 아닌 것 같은데?’
‘숨이 거칠어지고, 얼굴까지 이렇게 달아오른 거면... 이건... 진짜 깨어난 거 아닌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건가?’
순간 손태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렘과 당황, 혼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손태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고 서둘러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고 내려놓았다.
그래도 그녀의 손만큼은 그대로 잡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어느새 이 손을 잡는 데 익숙해진 듯, 더 이상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서로를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들 같았다.
“저기... 누나. 나 말이야, 아무래도 누나가 깨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내가 무섭거나... 부끄러워서 눈을 안 뜨는 거야?”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여보’라고 불렀던 호칭도 어느새 ‘누나’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아. 나 정말 진심으로 누나가 일어났으면 좋겠어. 그리고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봤으면 해. 이 세상엔 생각보다 예쁜 것도 많고 누나가 아껴야 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야.”
손태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인데... 누나가 다 회복되면 이 관계를 끝내자고 해도 나는 괜찮아. 그저 누나가 잘 살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야.”
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누나, 혹시 나와 헤어지기 싫으면... 그때는 평생 같이하자고 했던 내 말 유효한 거 알지? 나 요리도 꽤 잘해. 진짜야. 원하면 매일매일 해줄 수도 있어.”
잠시 말을 멈췄던 손태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이 차이... 흠... 누나가 그거 때문에 신경 쓰는 거면 나는 정말 괜찮아. 난 오히려 누나처럼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좋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누나가 판단해 줘야겠지.”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살짝 댔다.
‘진짜로 곧 눈을 뜰지도 모르겠네. 만약 깨어나서 날 밀어내면, 그건... 생각보다 많이 아플 것 같아...’
지금 이대로라면, 이 결혼을 그냥 이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이 차이 같은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양지유라는 여자라면 충분했다.
‘결국 문제는 누나가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느냐, 그거 하나겠지.’
“누나, 볼 뽀뽀... 해도 돼?”
손태하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장난기 어린 속삭임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꼭 쥐며 말을 이었다.
“말 없는 거 보니까... 된다는 거네?”
그 순간, 양지유가 손끝을 살짝 움켜쥐듯 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분명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약간은 긴장하고 있었다.
손태하는 머뭇거림 없이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왼쪽에 한 번, 오른쪽에 또 한 번.
가볍지만 설렘 가득한 첫 입맞춤이었다.
양지유의 숨결이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고 입술 사이에서 아주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읏...”
그 반응에 손태하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설렘과 벅참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누나... 우리 이제 부부잖아. 이렇게 오랜 시간을 누나와 함께 있었지만... 누나한테 뽀뽀한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다시 꼭 감싸 쥐었다.
“헤헷... 앞으로는 매일 해줄 거야. 진짜로.”
말끝을 흐리며 한참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혹시 괜찮으면 다시 ‘여보’라고 불러도 돼? 누나라는 호칭보다는 그 호칭이 더 좋아.”
조심스러운 말투와 달리 얼굴에는 기대가 어렸다.
양지유의 뺨은 어느새 더 붉어졌고 숨결은 여전히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반응은 그녀가 조금씩 정말로 깨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