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대학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온 요즘, 손태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이력서를 뿌리며 면접장을 전전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 한복판으로 나섰다.
이유는 단 하나, 직접 만든 ‘자기소개 겸 구직 광고판’을 들고 어떻게든 돈 벌 기회를 찾기 위해서였다.
[손태하, 남, 22세. 건강하고 체력 좋음. 곧 대학 졸업 예정.]
[18세 이상 여성과의 결혼을 희망함. 연상도 환영.]
[강성 지역 거주자 우대. 능력 있는 여성이라면 처가살이도 가능.]
[임시 남자친구 대행 가능. 일일 요금 50만 원부터, 숙박 포함 시 별도 협의.]
[과외 및 과제 대행 가능. 중고등 수학, 과학, 물리, 화학 모든 과목 가능.]
[가격 협의 가능! 관심 있으신 분은 지금 바로 연락하세요!]
...
손태하는 강성 근교의 한 외진 산골 마을 출신이었다.
대학 4년 내내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의 약값과 부모님 생활비까지 홀로 감당해 왔다.
과외, 과제 대행, 대리 구매, 대리 출석, 배달, 심부름, 심지어는 ‘대리 남친’ 서비스까지, 법에만 안 걸리면 못 할 게 없는 청춘이었다.
그에게는 선택이 아닌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졸업하면 무조건 안정적인 직장 하나는 잡아야 하는데, 요즘 취업 시장이 장난 아니잖아... 정 안 되면 능력 있는 연상 누나도 괜찮고, 돌싱이면 또 어때. 돈만 많으면 장땡이지. 인생은 원래 직진만 있는 게 아니잖아. 결혼으로 우회전 좀 해보자고.’
토요일 아침, 손태하는 평소보다도 더 이른 시간부터 자기 어필 광고판을 들고 번화가 지하철 출구 앞에 나섰다.
주말 아침이면 장을 보러 나온 어르신들과 약속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자네 뭐 하는 친구인가? 월급은 얼마나 받나?”
광고판을 목에 걸고 자리 잡자마자 어르신 한 분이 다가와 눈을 가늘게 뜨고 광고판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는 소프트웨어 개발 전공으로 이번에 졸업 앞두고 있어요. 지금은 구직 중인데, 세후 월 250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태하는 눈치 보며 둘러대는 성격도 아니었고 없는 직장을 있다고 속이지도 않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돌아가는 길도 마다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허세로 자신을 포장하진 않았다.
게다가 일자리만 잡히면 세후 월 250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런이런... 아직 월급 한 푼 못 받는 처지에 세후 250이래. 요즘 젊은이들 큰소리는 잘 친다니까.”
“곧 취직할 수 있을 겁니다. 면접도 몇 군데 보고 있고요...”
손태하는 어떻게든 이어서 말해보려 했지만, 어르신은 듣는 둥 마는 둥 손부터 내젓고는 자리를 떠났다.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 뒤로도 영양가 없는 문의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 패기는 좋네. 그런데 말이야, 자네 광고판에 처가살이도 가능하다고 써놨더군. 설마 능력 있는 여자 만나서 인생 한 방 노리겠단 거 아냐?”
“어르신, 어떤 여자든 저 같은 젊고 잘생긴 남자랑 만나면 서로 윈윈이죠.”
“차는 있나? 집은? 적금은 얼마나 들었고 부모님은 뭐 하시나?”
“한 달 수입이 400만 원은 돼?”
“우리 딸 올해 스물여덟인데, 사업 잘되는 남자 찾고 있어. 자네처럼 이제 막 졸업한 학생은 집에 들여봤자 짐 덩어리밖에 더 되겠나?”
“...”
손태하는 한참을 묵묵히 서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말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몇 마디 나눈 뒤엔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어릴 적부터 산골짜기에서 자란 가난한 집 아들인 데다가 연줄도 없고 돈도 없고 아직 취업도 못 한 처지인데... 누가 나 같은 사람을 눈여겨보겠어.’
그는 대학 4년 내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연애는커녕 제대로 마음 줄 틈도 없었고 어쩌다 시작해도 오래 가지 못했다.
여자친구 생일에 선물 한 번 제대로 못 사주는 남자, 데이트할 때마다 분식집이나 편의점으로 가는 남자, 뭐든 돈부터 계산하고 눈치부터 보는 남자, 그런 손태하의 곁에 오래 남아준 여자는 없었다.
그래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쯤은 처음도 아니었고 이제는 제법 익숙했다. 어쩌면 기대가 크지 않아서 실망이 덜 했던 걸지도 몰랐다.
시간은 어느새 오전 11시를 넘겼고 쨍쨍한 햇빛 아래 번화가는 서서히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손태하는 근처 나무 그늘에 앉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망했네. 연락처 하나도 못 받다니...’
그는 조용히 일어나 광고판을 들고 자리를 정리했다.
‘됐어... 내일 아침에 다시 나오자.’
“젊은이, 혹시... 진지하게 짝을 찾으러 나온 건가?”
“아, 네, 어르신. 안녕하세요.”
막 광고판을 접고 자리를 뜨려던 손태하 앞에 한 할머니가 다가섰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손태하가 바닥에 펼쳐뒀던 광고판을 유심히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혼 상대에게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말해보게.”
할머니는 광고판에 적힌 문구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크게 바라는 건 없어요. 아직 졸업도 안 했고 취업도 못 한 상태라... 그냥 절 좋게 봐주시는 분이면 감사하게 생각할 겁니다. 굳이 조건을 꼽자면 형편이 괜찮은 분이면 좋겠네요.”
‘외모나 나이는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되는 거고...’
할머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광고판의 한 항목을 짚으며 물었다.
“여기 보면 남자친구 대행 서비스도 한다고 돼 있네?”
“맞아요. 하루 기준 10만 원부터 시작이고요. 상황에 따라 조정도 가능합니다.”
‘이거... 진정한 귀인이 찾아온 건가?’
손태하는 순간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대략 예순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인자한 인상에 말투도 부드러웠다.
‘설마... 이 어르신께서 나를 ‘남자친구’로 계약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 해도 조건만 맞으면... 하루 일당으로 10만 원 넘게 준다면야 뭐... 나쁠 건 없겠는데?’
할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에는 예상외로 진지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허, 이 광고판 내용이 진짜일 줄이야. 사람들 눈길 끌려고 적은 말일 줄 알았는데... 흥미롭군.’
“젊은이, 만약 상대가 원한다면... 계약 결혼도 가능한가?”
“계약 결혼이요?”
손태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이런 요청은 또 처음인데?’
“조건만 맞는다면 서로 윈윈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관심 있으면 저 앞 벤치에서 이야기 좀 나눠보겠나?”
“네, 좋아요. 시간 괜찮습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손태하는 이번에는 평범한 제안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저 앞에 벤치 있지? 거기서 편하게 얘기해 보자고...”
“좋습니다, 어르신!”
그는 재빨리 광고판을 접어 가방에 넣고는 기대 반 궁금증 반의 마음으로 할머니를 따라 걸었다.
‘이런 경우는 진짜 처음인데... 일단 들어나 보자.’
함께 걷던 중 손태하가 무심코 물었다.
“어르신, 따님을 대신해서 결혼 상대를 찾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어르신 본인이 필요하신 건가요?”
말하고 나서야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아차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앞장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손태하는 문득 생각했다.
‘걸음도 정정하고 피부도 고우시고... 젊으셨을 땐 꽤 미인이셨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