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주석호가 입을 열었을 때 태극전 안은 고요했다.
태자 주호림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주석호가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천고의 명작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연모하던 여인까지 넘봤으니 말이다.
‘건방진 놈!’
순간 주석호를 바라보는 주호림의 시선에 한기가 가득 어렸다.
오황자 주평진은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석호를 바라보았다.
‘여섯째는 모두가 인정하는 쓰레기가 아니었나? 어떻게 저런 재능이 있단 말이지?’
순간 불타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주평진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호통을 쳤다.
“주석호, 그 입 다물 거라! 방 낭자는 큰형님께서 연모하는 여인이다. 그런데 지금 감히 방 낭자를 넘보는 것이냐?”
주평진은 말을 마친 뒤 잘 보이려는 듯이 주호림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그는 일찌감치 주호림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기에 최선을 다해 주호림의 이익을 지켜주려 했다.
주호림은 그 말을 듣더니 주평진을 향해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주평진의 반대에도 주석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위에 앉아 있는 무황을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황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사실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무황은 태자가 방청옥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방청옥을 태자비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동안 늘 무시당하던 주석호가 오늘 갑자기 엄청난 재능을 보여주며 그에게 난제를 던져주었다.
주석호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태자가 상처받을 것이고, 주석호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공을 세운 그에게 상을 주지 못하는 꼴이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황이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주평진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바마마, 여섯째가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조금 전 그 시도 어디선가 베낀 것...”
주평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북양 대신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무황은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 입 다물 거라!”
황제가 호통을 치자 주평진은 순간 넋이 나가서 자기도 모르게 주호림을 바라보았다.
주호림은 표정이 좋지 않았고 눈빛에 불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걸까?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걸까?’
주평진은 어리둥절했다.
“하하하하...”
이때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크게 웃은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남양의 평서왕이었다.
양해승은 크게 웃으면서 양만수에게 말했다.
“형님, 우리만 의심하는 게 아니라 북양 황실 사람들도 육황자의 실력을 의심하는군요!”
양만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뒤 무황을 향해 예를 갖추며 말했다.
“무황 폐하, 육황자 전하께서 다른 이의 시를 베꼈다고 하니 조금 전의 결과는 없던 일로 하셔야겠사옵니다.”
그의 말 한마디 때문에 주석호의 절창은 남의 것을 베낀 것이 되어버렸다.
무황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주평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창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주평진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황자는 몸이 편찮으니 좀 쉬어야겠구나. 여봐라, 오황자를 데려가거라.”
주평진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 안색이 창백해지고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내쫓긴다면 아마 평생 냉대받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주평진은 곧바로 저항하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호림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태자 전...”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마자 곧바로 호위무사가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빠르게 그를 데리고 나갔다.
태자 주호림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주석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싸늘했다.
주석호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주평진을 제거했다.
예전의 무뢰한 같던 행실들은 죄다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오늘 같은 중요한 순간에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저렇게 교활하다니!’
그런 생각이 들자 주호림은 순간 살기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방청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주석호의 시를 들었을 때, 아무리 주석호를 싫어하는 방청옥이라고 해도 그가 읊은 시가 다시 없을 명작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악명이 자자하던 무능력한 황자가 어찌 그런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특히 주석호가 무황에게 그녀와 혼인시켜달라고 했을 때 방청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주석호는 역시나 사람들이 익히 아는 그 주석호였다.
비록 조금 전 주석호가 이긴 것이 없던 일이 되어 아쉽긴 하지만 그 때문에 혼인도 없는 일이 되었으니 방청옥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한편, 주석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에게 빌미를 주는 멍청한 말을 하는 걸 보면 주평진은 참으로 눈치가 없었다.
물론 더욱 괘씸한 것은 남양의 두 황자였다. 그들은 기회를 틈타 그의 계획을 망쳤다.
주석호는 몸을 돌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양만수를 바라보았다.
“청주왕께서는 조금 전 제가 다른 이의 시를 베꼈다고 하였지요. 그렇다면 저와 한 번 겨뤄보시겠습니까?”
양만수는 주석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살짝 놀랐다.
주석호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무능력한 황자가 어떻게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단 말인가?
그런 눈빛은 오직 그의 큰형님, 즉 남양의 태자에게서만 보았었다.
조금 전 주석호가 다른 이의 시를 베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양만수는 그 순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양만수가 망설이는 사이 주석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비아냥댔다.
“왜 그러십니까? 제게 질까 봐 두려운 것입니까?”
양만수의 얼굴에서 평온함이 사라지고 대신 분노가 자리 잡았다.
조금 전 남하택이 북양 사람들을 조롱할 때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 이 순간 주석호가 그에게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준 것이다.
북양 사람들은 순간 속이 후련했다.
칠황자 주남기는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
“형님,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혹시 저희 형님을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남기야, 조용히 하거라.”
무황은 비록 주남기를 나무랐지만 전혀 꾸짖는 것 같지 않았다.
연회 시작부터 남양에게 기가 눌려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다시 전세가 역전되었다.
무황은 흐뭇한 얼굴로 주석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관심을 가진 적이 없는 아들이 이 순간 북양을 구할 사람이 될 줄이야.
무황은 시선을 거둔 뒤 양만수에게 말했다.
“청주왕, 계속 겨루겠소?”
양만수는 얼굴이 벌게졌다. 지금 겨루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들이 겁을 먹는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남양은 체면을 잃게 된다.
하지만 만약 겨루겠다고 한다면, 그래서 주석호가 또 하나의 명작을 읊는다면 그들은 더욱 비참하게 질 것이다.
남양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전의 오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방청옥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주석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주석호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또 한 번 겨루겠다고 말한 건지 알지 못했다.
설마 그에게 정말로 시를 짓는 것에 재능이 있는 것일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방청옥은 이내 자신의 추측을 부정했다.
주석호가 시를 그렇게 잘 지을 리가 없었다. 주석호는 남양 사람들이 자신의 제안에 응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만약 남양에서 그의 제안에 응한다면...
그런 생각이 들자 방청옥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자신이 주석호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방청옥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내가 저런 무뢰한을 걱정하다니.’
방청옥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저 북양이 체면을 구길까 봐 걱정되는 것뿐이야. 그래, 그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방청옥은 술잔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 했다.
그런데 이때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양만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무황 폐하, 문식은 당연히 겨루어야 하옵니다.”
방청옥은 그 말을 듣자 손을 움찔 떨었고 그 탓에 술이 쏟아졌다.
남양에서 겨루겠다고 했으니 주석호의 실력이 들통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