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얼마 지나지 않아 채소와 고기를 넣은 비빔면이 두 그릇 식탁에 올라왔고 아주 맛있어 보였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지한은 배가 고팠는지 금세 그릇을 비웠다.
먼저 다 먹은 공지한이 임윤슬에게 말했다.
“당신은 먼저 쉬어. 난 서재에서 좀 처리할 게 있어. 내일은 할아버지 댁에서 저녁 먹자. 오후에 내가 데리러 올게.”
“아뇨. 굳이 번거롭게 오지 않아도 돼요. 제가 택시 타고 갈게요. 그냥 몇 시에 도착할 건지만 알려주면 비슷하게 시간 맞춰 갈게요.”
“내일은 일정이 많지 않아. 내가 데리러 올게. 택시 불편하잖아.”
“네.”
임윤슬은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국수를 먹었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공지한도 곧 자리를 털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임윤슬이 일어났을 때 공지한은 이미 회사에 가고 없었다. 점심 무렵에 억지로 간단히 음식을 차려 먹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 억지로 국 한 그릇과 밥 반 공기를 삼켰고 막 치우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어제 뉴스를 뜨겁게 달군 여주인공이 서 있었다.
확실히 윤하영은 아름다웠고 얼음 위를 걷는 백조 같았다.
“임윤슬 씨, 안녕하세요. 저는 윤하영이라고 해요. 지한이 친구예요.”
“알고 있어요.”
임윤슬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부신 백조 앞에서 자신은 초라한 미운 오리 새끼처럼 느껴졌으니까.
몸을 비키며 윤하영을 집 안으로 들였다. 이어 물 한 잔을 따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어제 지한이가 우리 집에 시계를 두고 갔거든요. 근데 오늘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돼서... 마침 근처라 직접 가져왔어요.”
윤하영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고 얼굴의 미소는 눈부셨지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임윤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네, 제가 전해드릴게요. 번거로우셨을 텐데 이렇게 직접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임윤슬은 불편함을 꾹 참으며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요. 따로 식사 권해드리진 못하겠네요. 다른 볼일 없으시면 전 이만 쉴게요.”
“네, 방해하지 않을 테니 푹 쉬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윤하영은 품위 있는 미소로 작별을 고했다.
저택 문을 나서자 윤하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바로 사라졌다. 원래 이 집의 안주인은 바로 자신, 윤하영이어야 했으니까.
공지한은 분명 공항에 자신을 마중하러 왔고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일부러 물을 흘려 그의 손에 묻게 했고 그녀의 계획대로 공지한은 시계를 벗고 화장실로 갔다. 그러나 물기를 닦고 돌아온 뒤 공지한은 곧장 떠나버렸고 시계는 두고 갔다.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여하간에 알고 있었으니까. 공지한이 줄곧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공지한은 의리 깊은 사람이었고 또한 그녀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떠나 있던 몇 해 동안 그의 곁에 다른 여자도 없었고 스캔들조차 나지 않았다.
비록 해외에 있었지만 윤하영은 늘 그의 소식을 빠지지 않고 챙겨왔고 주변에 여자가 없다는 것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결혼했다니. 그것도 공대훈이 정해준 혼사이지 않은가. 공지한의 아내는 겉보기에 너무 어려 보여 정말로 성인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공지한의 아내가 누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다친 다리로 다시는 춤을 출 수 없게 된 이상 공지한만은 반드시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윤하영이 떠난 후 임윤슬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시계를 보았다. 그 시계는 공지한의 것이 맞았다.
오랜 세월 공지한의 손목에 있던 시계였고 대학 졸업 선물로 공대훈이 사 준 것이었다.
한 번은 그가 침대 머리맡에 벗어 두었던 것을 집어 보았는데 뒷면에는 ‘JH'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이때 핸드폰이 울리며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공지한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10분 뒤에 도착하니까 준비하고 나와.”
“네.”
임윤슬은 마음을 다잡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후 현관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차가 도착했고 그녀는 차에 올라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지한은 자신의 아내가 어딘가 달라진 걸 느꼈다. 그러나 평소에도 아내에게 무신경했던지라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임윤슬은 임신으로 감정 기복이 심해졌고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윤하영이 집에 다녀갔다는 것과 시계를 전해주러 왔다는 사실을 공지한에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몰래 공지한의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면 될지 말이다.
그렇게 차 안은 침묵뿐이었다.
본가에 도착하자 김순자가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있었고 임윤슬은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자 공지한이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가 금방 다 하시니까 오늘은 가지 말고 앉아서 쉬어.”
공지한은 그녀가 온종일 멍하니 있는 게 신경 쓰였지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니 그저 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그럼 전 정원에 가서 할아버지 꽃이나 구경하고 있을게요.”
그의 말에 임윤슬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정원에 핀 꽃을 보며 마음을 달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난 서재에 가서 할아버지를 뵐게.”
“네.”
대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지한이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공대훈은 책상 위의 물건을 집어 던졌다. 공지한은 피하지도 않았던지라 정통으로 맞아 이마에 상처가 생겼다.
공대훈은 신문을 움켜쥔 채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호통쳤다.
“이 썩을 놈아! 네가 무슨 짓을 한 지 알고는 있냐? 윤슬이는 어쩌고 밖에 싸돌아다녀서 이런 추문을 만들어! 뉴스에 온통 네 얘기뿐이더구나!”
“기사는 이미 사람을 시켜 내리게 했습니다.”
“그런다고 윤슬이가 모를 줄 알아? 이렇게 좋은 아내를 두고 소중히 여기지 못하다니! 네가 후회하는 날이 올 게다. 그땐 날 찾아와서 울고불고하지 마!”
“처음부터 할아버지가 억지로 결혼시킨 거잖아요. 제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런 날이 올 줄 아셨어야죠.”
“너, 너! 네 놈은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공대훈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공지한에게 달려들었다.
이때 임윤슬이 뛰어 들어와 황급히 공대훈을 막아섰다.
“할아버지, 몸 상하셔요. 화 좀 가라앉히세요, 네?”
임윤슬은 공대훈을 부축해 앉히고는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남편을 보았다. 참으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사실 공지한이 공대훈에게 결혼은 할아버지가 억지로 시킨 거라고 말했을 때 이미 서재 문 앞에 있었다. 물론 몰래 엿 들은 건 아니었다. 김순자가 저녁이 다 됐다며 두 사람을 불러 달라고 해서 막 올라온 참이었다.
그러다가 잔뜩 화가 난 공대훈의 목소리가 들려 황급히 달려왔다. 행여나 공대훈이 흥분해 몸에 무리가 갈까 봐 걱정도 됐고 군인 출신이라 아직 힘이 있으니 남편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공지한은 이미 이마가 터져 있었다. 정말이지 공지한도 문제였다. 공대훈이 화가 나면 한발 물러서거나 적어도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임윤슬은 약을 챙겨와 공지한 앞에 앉았다. 공지한의 상처를 치료해주려는 것이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약 바를 필요 없어.”
“작은 상처라도 약은 발라요 빨리 낫죠. 덧나면 더 큰 일에요.”
임윤슬은 소독약을 적신 면봉을 조심스럽게 그의 상처에 가져다 댔다.
공지한은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어제 그가 윤하영 마중을 나간 건 사실이었지만 호텔까지만 데려다주고 곧장 회사로 가 야근을 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 휴식실에서 잠들었다.
그 공항에 기자가 숨어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기사가 터지자마자 급히 내리게 조치하긴 했지만... 임윤슬이 그 기사를 보았는지 신경 쓰였다.
정말로 신경 안 쓰는 건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어서 오늘따라 이상했던 건지, 왜 자신에게 직접 묻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