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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2장 세 조건

배진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날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난 배진욱이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거라고 단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다면 진작 내게 말해줬을 것이다. 배진욱이 말을 꺼내지 않자 나도 입을 꾹 다물었고 우리는 한참 대치 상태에 놓였다. 몇 분 뒤, 배진욱은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참을성이 늘었네? 예전엔 절대 버티지 못했는데.” 배진욱은 아마 대학 다니던 시절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의 배진욱이 날 이렇게 약 올렸다면 난 진작 발을 구르며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변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고 난 미소를 지으며 배진욱을 바라봤다. “너도 마찬가지야. 예전엔 너도 이러지 않았잖아.” 과거의 배진욱은 착하고 용감했으며 정의로웠다. 그러나 현재의 배진욱은 계산적으로 움직였으며 매 걸음마다 정확하게 걸으려 애썼다. 달라진 환경 때문인 건지는 몰라도 나와 배진욱은 이미 많이 변해버렸고 더 이상 나란히 설 수가 없었다. 배진욱이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했다. “세 개 조건이 있어. 그런데 두 가지는 네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넌 마지막 하나만 들어주면 돼.” 난 긴장이 되어 침대 시트를 꽉 쥐며 말했다. “뭔데?” 만약 배진욱이 내가 가진 지분을 내놓으라 하거나 디자인 특허를 내놓으라 한다면 난 결국 타협하고 내놓을 것이다. 그런데 배진욱은 내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난 희주 네가 하지 못할 일을 강요하지는 않을 거니까.” “넌 그냥 얌전히 치료만 받고 민혁 씨랑 결혼만 하지 말아줘.” 배진욱은 애써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시선은 나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 말에 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얌전히 치료를 받고 안민혁과 결혼하지 말라니. 이게 대체 무슨 조건이란 말인가? 난 입을 벙긋거렸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 조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배진욱은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해줄 수 있어?” “나머지 두 조건은 뭔데?” 난 대답 대신 질문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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