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밤 9시. 밤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초가을. 땅에는 떨어진 낙엽이 뒹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아연은 택시에서 내렸고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자신의 치마 자락을 매만졌다. 가방을 어깨에 다시 메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해 걸어갔다. 어두운 밤, 그녀는 빨간색의 롱스커트의 서스펜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침에 외출할 때는 단정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그녀가 정원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른 남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저런 옷을 입었다는 사실이 박시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아연은 조용히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왔고, 박시준이 아직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블랙 셔츠를 입고 있는 그는 오늘따라 더욱더 냉혈한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굳어 있었고, 그런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그녀는 애썼다. 실내화로 갈아 신은 다음, 그녀는 그와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때 아침에 그녀가 힘들어할 때, 티슈라도 건네준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거실로 걸어가 그를 마주했다. 이상하게 오늘 집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항상 맞아주시던 이모님이 보이지 않았다. "저 오늘... 이모님은 집에 안 계시나요?"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긴장되는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그냥 방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가까이 와." 무미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실에는 두 사람밖에 없어 못 들은 척도 할 수 없었다. "왜요?" 그녀는 살며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가까이 오라고 하지 않았나?" 누가 봐도 그는 화를 억누른 채 말하고 있는게 느껴졌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다가갔다. 그의 명령을 거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휠체어 신세인 그라 할지라도 그녀는 무서웠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무슨 일인데요? 혹시 이제 이혼하는 건가요?"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은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은은한 와인향이 났다. 그녀는 술을 마셨다. 그는 갑자기 칠흑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며 불쾌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의 큰 손이 갑작스럽게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챘다. "술을 마셨다? 아주 즐거웠나 보군?" 진아연은 그에게 잡힌 손목이 너무 아파 빼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박시준 씨, 이거 놔요! 아파요!" 진아연이 손목을 빼내려 할수록 그는 더욱 세게 잡았다. 일부러 그녀를 아프게 하려고 하는 거 같았다. "묻잖아. 즐거웠냐고. 대답해!" 그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바라볼수록 이상하게 더 화가 났다. "즐거웠냐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진아연은 붙잡힌 손목을 빼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러다 방금 들은 질문이 생각났다. "박시준 씨, 저 술 안 마셨어요!" 두려움에 울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침을 한번 삼키며, 그녀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당겼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했지만 분명... 술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의 차가운 코끝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의 피부는 부드러웠고 따뜻한 우유 향이 났다. 이상했다. 전혀 그녀의 몸에서는 전혀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진아연은 갑작스러운 그의 스킨십에 몸이 얼어버렸고, 그의 코끝이 목덜미에 닿아 간지러웠다.. 그녀는 지금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있으며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멈췄다. 그에게 잡혔던 손목은 아직도 시큰거리며 아팠다. 진아연은 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억울했다. 그의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아 신경 또한 회복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그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큰 각오를 하고 행동한 것이다. 다행히 그는 지금 그녀가 허벅지를 꼬집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떨어지며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네 옷에서 다른 남자 향기가 나. 네가 직접 벗을래? 아니면 벗겨줄까?"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줬다. 진아연은 기가 막혔다. 그녀의 옷에서 술과 다른 남자의 냄새가 난다고? 잠깐...만. 지금 옷을 벗으라고 들은 게 맞는 건가? 지금? 여기서?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치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는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찍' 소리! 그녀가 그에게 안기는 동시에 그녀의 옷은 찢겨졌다! "아!" 등 뒤 쪽 부분이 찢겨 나간 것이 느껴졌다. 드러난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는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박시준! 당신 미쳤어!" 그는 그녀를 옆쪽 소파에 앉혔고 그녀의 어깨와 등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네 신분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 박 사모님!" 진아연은 찢겨 나간 드레스 조각을 손에 들고 있는 진아연의 두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오늘 있던 약속은 모두 부회장이 준비한 것이다. 이 드레스 역시 부회장이 준비했다. 은행장들이 그녀에게 계속 술을 권해서 계속 거절했는데 잘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말 없이 조용히 술자리를 떠났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임신 중이라 술을 마실 수 없다. 상황상 그녀는 절대로 밖에서 술을 마실 조건이 못되었다. "박시준 씨! 난 박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걸 원하지 않아요. 당신의 요구사항을 내게 강요하지 마세요!" 진아연은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찢긴 옷을 부여잡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당신 정말이지 짜증 나!" 사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트러블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박시준은 오늘 그녀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며 수치감을 안겨줬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박시준의 얼음장 같던 얼굴에 순간적으로 동요하는 눈빛이 스쳤다. 이상하게 그는 그녀 앞에서 감정을 통제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사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그녀가 찾아와 부탁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자신에게 도와달라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갔다. 하루 종일 쌓였던 서운함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그녀가 직접 말한적은 없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를 악마보다 무서워하는 것을 말이다.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조지운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회장님, 진 아가씨는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셨습니까? 제가 성 대표님과 술을 마시러 갔다가 우연치 않게 진 아가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녁 약속했던 두 은행장과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고 룸을 빠져나오셨습니다. 문자를 본 박시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를 찾아오지 않고 다른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약속 장소에 가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더군다나 노출있는 차림으로 약속 장소에 나가다니. ...... 누군가 노크를 했다. 진아연은 문을 열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음식을 가져다 드리라고 하셔서요. 뭘 드시고 싶은지 몰라 국수를 해왔습니다." 이모님은 테이블에 국수를 내려놓았다. 진아연은 샤워를 하며 박시준이 오늘 그녀에게 했던 행동을 애써 잊어버리려고 했다. "이건 무슨 뜻인가요?" 그녀는 이모님이 끓여온 국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배가 매우 고팠지만 먹고 싶지는 않았다. "대표님께서 아까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고 계시는 게 아니실까요. 방금 사모님이 방에 들어가실 때 표정이 좋지 않으셨어요. "이모님은 침대에 놓인 드레스를 집어 들며 말했다 "수선해 드릴까요?" 진아연: "괜찮아요. 이 드레스는 빌린 거예요. 가격표만 좀 가져다 주세요." 이모님: "아..." 진아연은 크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드레스 비용을 갚을 수가 없거든요." 이모님: "알겠습니다. 좀 드시고 일찍 주무세요. 아, 내일이면 박 사모님께서 퇴원하셔서 대표님과 본가에 가셔야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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