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삽시간에 조용해진 거실에는 숨소리만 들렸다. 진아연은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세게 닫았다. '쾅!' 별장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감히 박시준이 있는 자리에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여자는 진아연이 처음일 것이다. 모두들 긴장한 상태로 조심스럽게 박시준의 표정을 살폈고, 그의 태연한 표정을 보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그의 앞에서 감히 60데시벨 이상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 진아연의 행동은 최소 90데시벨을 넘고도 충분했는데 그는 평온해 보였다. 중요한 것은 방금 진아연이 깨뜨린 와인 한 병의 가격이 거의 이천만 원을 육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실 기회를 잃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순식간에 깨트려버렸다. "음... 사실 어제 진 아가씨께서 부친 장례를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으신 이유도 아마... 장례식장에서 바로 돌아오신 거 갔습니다." 긴 침묵을 깨트리고 누군가 말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이름은 강진. ST그룹의 홍보부장이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박시준의 회복을 축하하기 위해 모두들 박시준의 별장으로 와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 진아연과의 다툼으로 그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박시준이 지금은 차분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언제든지 자신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진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사과했다. "시준아, 미안... 진아연씨 부친상은 전혀 몰랐어." 박시준은 피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그리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뒤, 테이블에 잔을 올려놓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생일 축하해." 강진의 귀가 빨개졌다. "고마워." "근데... 진아연은 네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박시준은 천천히 자신의 셔츠 깃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깔며 경고했다.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 나 말고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강진은 많이 당황했다. "하, 하지만... 저 여자는 어차피 이혼할 사람이고. 너한테도 골칫덩어리잖아!" 박시준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설령 내가 이때 이모님이 와서 깨진 술병 조각들과 더러워진 버릴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보는 앞에서 마음대로 그녀를 밟을 자격이 없어, 그게 누구든간에." 카펫을 치우려 했다. 박시준의 와인 잔에는 친구들이 따른 와인으로 이미 가득 찼다. "알았어. 시준아... 화내지 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강진이가... 진아연 씨를 정말 때릴 리가 없잖아." 박시준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수습하려 했다. "그, 그래! 강진! 너 아직 벌주 세 잔 아직 안 마셨다? 오늘 네 생일이라고 너무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니냐!" 강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들고 세 잔을 마시려 했다. 박시준은 옆에 있던 경호원을 흘끔 보았다. 경호원은 즉시 다가와 휠체어를 잡았다. "그럼 다들 즐기다 가!" 이 말을 남긴 채, 박시준은 유유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강진은 자신에게 태도가 달라져버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충혈된 눈으로 와인 세 잔을 마시기 위해 걸어갔다. "뭐야! 주인공도 없는데 계속 마시려고?" "마시게 해! 강진이 속 좀 쓰릴 텐데. 항상 자기가 박 사모님이 될 거라고 생각했잖아!" "그렇다고 오늘 이 일로 포기할 강진이 아니지! 어쨌거나 시준이 진아연과 이혼한대잖아." "그나저나 진아연 씨, 예쁘긴 하더라. 근데 한 성격하는 거 같던데 시준이가 이혼 전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 손님방. 진아연은 무릎을 꼭 껴앉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3일 동안 참았던 모든 감정들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아버지가 임종 전, 힘겹게 자신에게 사과하던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살아계실 때, 아버지를 미워하던 자신의 모습이 후회됐다. 그렇게 방 안에서 혼자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밤새 운 탓에 눈은 퉁퉁 부어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방에서 나왔다. 며칠 동안 입맛이 없어 제대로 먹질 않았더니 속이 약간 쓰렸다. 그녀는 식당으로 가다 박시준의 뒷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때 이모님이 그녀를 발견하고 바로 인사를 건넸다. "사모님, 아침 식사하셔야죠! 어서 오세요!" 예전 같았으면 그녀는 그가 기분이 나쁠까 봐 최대한 피해 다녔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이혼을 미뤄야 하는 이유가 생겼으니 더 이상 죄인처럼 피해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이모님은 아침 식사를 그녀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젓가락을 들던 순간. "어젯밤 그 와인. 이천만 원짜리야." 담담한 그의 목소리. 젓가락을 쥐고 있던 진아연은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이, 이천만 원? 고작 와인 한 병에? 아니. 대체 어떤 와인이길래 그렇게 비싼 거지? 설마... 물어내라는 건가? 설마 그는 그녀가 물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갑자기 위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온갖 생각들로 등에는 식은땀이 났고 입맛도 싹 사라졌다. 박시준은 조용히 그녀의 퉁퉁 부은 눈과 수척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야. 내 허락 없이 그렇게 경거망동하면 그땐 가만 안 둬!" 다행히 이번에는 넘어가겠다는 그의 말을 듣자 다시 속이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임신 초기에 대다수의 여성들은하루 종일 누워있을 정도로 헛구역질이 심하다고 들었다. 다행히 그녀는 가끔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제외하고는 헛구역질은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릇에 담긴 고기를 보니 갑자기 속이 불편해졌고, 그래서 바로 고기를 빼냈다. "사모님,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세요?" 이모님은 그녀가 고기를 빼내자 약간 긴장한 듯 물어보았다.. 진아연은 고개를 저으며 "아, 저 사실 요즘 채소만 먹어요." 이모님은 그 말에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진아연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진준의 고문 변호사가 오늘 그녀에게 만나자고 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만나자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대략 예상이 갔다.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가방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하필이면 박시준 역시 외출 준비를 마치고 막 나가려던 참이였다. 운전사가 그를 데리러 왔다. 진아연은 시간을 한번 보았다. 열시에 변호사와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아홉시가 다 돼갔다. 별장촌에서 빠른 걸음으로 10분 정도 걸어 나가야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어제 한바탕 가을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쌀쌀한 날씨였다. 갑자기 찬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얼마 걷지도 못하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은색의 벤틀리는 주차장에서 나와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진아연을 닮은 사람이 보이자 기사님은 약간 속도를 늦췄다. "사모님 같은데..." 점점 가까워지자 기사는 중얼거리며 다시 속도를 줄였다. 기사는 사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그녀의 옷차림이 인상에 남아 알아본 것이다. 뒤에서 눈을 감고 있던 박시준은 기사의 말에 감긴 눈을 떴다. "박 회장님, 사모님께서... 토하시는 거 같습니다." 운전석에 있는 기사는 그녀의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진아연은 아침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헛구역질이 심하지 않아 속으로 내심 기뻐했다. 하지만 이렇게 길에서 토를 할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쓰레기통을 붙잡고 토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 다시 세수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본 순간, 박시준의 고급 세단이 보였다. 아침 햇빛에 비친 그의 차는 밝게 빛나다 못해 눈이 부셨다. 어느 순간 그녀 옆에 차를 세우더니 차창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박시준의 눈과 마주쳤다. 순식간의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설마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린 채, 뒷자리에 앉아있는 그를 의식하며 말했다. "아... 하하. 아침을 너무 많이 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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