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딱 봐도 보통사이는 아니다

“우리는...” 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 한 분이 걸어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할머니가 설마 원아 아줌마의 엄마는 아니겠지? “할머니!” 훈아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할머니...... 원아는 훈아의 시선을 따라 뒤쪽을 쳐다보았다. 반백이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흰색과 핑크색이 섞인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그녀는 갑자기 세 사람 앞에서 멈추어 섰다. 문소남은 이 사람이 원아의 엄마가 아닌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원아는 아줌마의 시선이 불편했다. 아줌마는 ‘에휴’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스트레칭을 하면서 이제 집에 돌아온 듯한 원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노파심에 충고라고 하려는 듯 눈썹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시집을 갔으면 살림살이도 해야지. 남편과 아이를 굶기면 어떡해. 시간이 몇 시인데 이제 들어와?” ‘남편’이라는 호칭은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는 남자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원아는 너무 어색했다. 그녀가 뭐라고 해명이라도 하려는 그때, 아줌마는 또 문소남을 바라보더니 그에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남편이란 사람도 잘한 건 없어. 기분 좀 나쁘다고 바로 와이프한테 얼굴 구기면 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지금은 남자도 밥할 줄 알아야 하고 아내가 하는 집안일도 도와줘야지. 와이프한테만 의존하면 어떡해? 네가 아내랑 결혼 한 거지 도우미와 결혼한 게 아니잖아?” 원아는 아줌마의 말이 점점 선을 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오해가 생긴 거지? 딱 봐도 그들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닌 게 눈에 보이는데... “아주머니, 뭔가 오해하고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상사랑 직원 사이에요.” 원아는 다급히 해명했다. 뭐라 계속 말하려던 아줌마의 입이 갑자기 멈추었다. 아줌마는 원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잠시 후 아줌마는 뭐라 말하려 입을 우물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세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변명을 해? 누구를 속이려고? 아무리 사회적 풍기가 나빠지고 도덕이 몰락 된다 해도 말이지. 이 동네에 돈 많은 남자한테 빌붙어서 사는 사람이 있다니... 아무런 이유 없이 오해를 받게 된 원아는 자리를 떠나는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부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둘 다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직 미혼인 여자가 지켜야 하는 선이 뭔지 원아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일 때문에 남자를 만나는 건 상관없지만 늦은 시간에 사적으로 낯선 남자와 만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소남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옆에 있는 아들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볼 일이 뭐야. 빨리 말해!” 원아는 고개를 돌렸다. 문훈아는 두 어른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기에 온 건지 자기도 잘 몰랐다. 근데... 분명 아빠가 여기에 볼일 있다 그랬는데... 나보고 빨리 말하라고 하면... 아, 맞다! 훈아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 근데 난 아빠따라 온 것뿐인데... 아이는 작은 팔, 다리로 어둠 속에서 힘겹게 커다란 박스 두 개를 끌고 왔다. 하나는 연 파란색, 나머지 하나는 흰색이었다. 상자에는 실크 리본이 정성스럽게 묶여있었다. “원아 아줌마, 이건 아줌마한테 주는 선물.” 말을 끝낸 훈아는 뒤돌아 아빠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틀리게 말했을 까봐 걱정이 되었다. 훈아는 키가 작다. 아직 어린아이였기에 원아는 훈아의 말소리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훈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비록 문소남이 준 선물을 받지 않을 것이긴 하지만 힘겹게 들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원아는 일단 그 선물을 받았다. 박스를 치우자 이제서야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원아는 고개 들어 아이를 바라보더니 상냥하게 웃었다. “이걸 아줌마한테 왜 주는 거야?” 비록 이 말을 아이한테 묻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아빠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아는 그 냉랭한 남자가 지금 자신의 왼손에 껴있는 반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반지는 약혼의 의미였다. “음... 나도 모르겠어......”문훈아는 원아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아이는 순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할 일 끝났으면 이제 집에 가자!” 문소남은 아들에게 말 한마디 할 뿐이었다. 그는 깊고 짙은 눈빛으로 선물 박스를 안고 있는 원아를 바라보더니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원아와 훈아는 가차 없이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우리 아빠가...” 훈아는 말을 하려다 그만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원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훈아에게 말했다. “아줌마 이 선물 못 받아.” “왜?” 그 이유는 5살의 남자아이에게 들려줄 수 없었다. 들려줘도 이해 못 한다. 그녀는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까.” 말이 끝나자 원아는 웃으며 커다란 박스를 훈아에게 다시 돌려줬다. “더 있으면 아빠 어디 있는지 찾지도 못하겠다. 빨리 가. 선물도 아줌마 대신 돌려줘.” ...... 동네 입구, 길가에는 흰색 포르쉐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었다. 남자는 침울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으며 다른 한 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남자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더니 다시 내뱉었다. “뒤에 쓰레기통 보이지? 거기다 버려!” 문소남은 아들이 안고 있는 박스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 두 사람은 문씨 저택으로 돌아왔다. 문소남이 차를 세우자마자 내내 조용히 앉아있던 훈아는 벨트를 풀더니 차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어르신은 마당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르신은 증손자가 차에서 단번에 뛰어내려 바로 집으로 뛰쳐 올라가는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리 증손자가 왜 저러지? 누가 괴롭힌 거야?” 이 부자는 5년 동안 싸우거나 다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문소남은 넥타이를 살짝 풀더니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너한테 질척거리는 거, 훈아가 또 본 거야?” 문소남의 엄마의 장인숙은 아들의 정장 재킷을 받으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소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인숙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훈아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이런 일들밖에 없었다. 훈아와 원원이는 애지중지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외부인과 접촉한 적이 거의 없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엄마가 무엇인지 그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서 엄마가 뭔지 알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빠만 있을 뿐만 아니라 엄마도 있다는 사실을. 훈아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엄마는 어딨어?” 어르신은 너네들은 엄마가 없다면서 계속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5살의 훈아는 철이 많이 들었고 어르신의 거짓말은 아이를 속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이의 순진하고 진실을 갈망하는 두 눈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어르신은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네 엄마는 아주 먼 곳으로 갔어. 다시 돌아온다면 증조할아버지가 아빠한테 꼭 만나게 해주라고 말할게.” 이 말은 훈아만 듣게 되었고, 그는 이 말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장인숙은 아들의 재킷을 하인에게 건넸고, 하인은 자리를 떠났다. 장인숙은 창가에 서서 별장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문소남의 엄마로, 두 아이의 할머니로서 그녀는 아이들의 엄마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궁금 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지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무도 그때의 거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로서 아들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본 적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에 아들의 곁을 지키던 정 집사와 박 기사 부부는 좋지 않은 몸 상태 문제로 은퇴를 했다. 장인숙은 생각에 빠졌다. 나중에 거기를 지나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가서 한 번 물어봐야겠어. 혹시라도 뭔가를 알아낼 수 있게 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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