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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백연이 눈을 뜨자 창백하고 마른 두 손이 그녀의 목에서 몇 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 윤곽은 어둑하게 가려져 있었고 너무 길게 자란 머리가 눈을 덮어 버려 뾰족한 턱선과 얇은 입술만 드러냈다. 남자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이불 덮어주려고요...” 백연은 상체를 일으켜 그에게 손짓했다. “얼굴. 이쪽으로 내밀어.” 원래 상반신을 숙이고 있던 남자는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기울였다. 짜악! 맑고 공간을 짓이기는 듯한 손바닥 소리가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남자의 얼굴이 한쪽으로 홱 돌아갔고 백연의 손바닥에는 얼얼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한때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뺨 한 대쯤은 오히려 약한 편이었다. “이건 네게 주는 상이야.” 백연은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꺼져.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이 방에 들어오면 다리부터 부러뜨릴 거야.” 그는 고개를 숙였지만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독사 같았다. 분명 눈이 긴 머리칼에 가려져 있는데도 백연은 차갑고 끈적하고 역겨운 증오의 시선이 피부를 타고 스며드는 걸 느꼈다. “...네.” 그는 천천히 일어서자 헐렁한 티셔츠 아래로 대나무처럼 깡마른 몸이 드러났고 굼뜬 걸음으로 방을 나서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백연은 침대에 다시 누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 몸으로 돌아온 지 벌써 사흘째였다. 그동안 그녀의 몸은 8년이나 책 속 스토리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이 세계는 원래부터 하나의 소설이었고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은 악역을 타락으로 몰아넣는 악랄한 양누나였다. 조금 전 그녀의 목을 노리던 남자는 바로 부모님과 함께 입양한 동생, 백진우였다. 책 속에서 백진우는 그녀의 학대 속에서 자라며 마음이 어린 시절부터 꼬여있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잔혹함은 더 심해져 결국 백진우가 흑화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백진우의 함정에 빠져 술을 마시고 차를 몰다가 죽게 된다. 백진우 역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끝에 여주를 납치한 순간 남주에게 사망하는 엔딩을 맞이한다. 처음 돌아왔을 때만 해도 백연은 이 깨진 남매 관계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기대했었으나... 빵 속에 숨겨진 면도날과 우유컵의 깨진 유리 조각들을 본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백진우는 수능 끝나자마자 이미 그녀를 죽일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1년 남았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백진우는 1년 후에 그녀를 죽일 것이다. 아직 시간은 남았으니 괜찮았다. 그 계획을 어떻게든 방해하면 그만이니까. 백연은 침대에 누워 다리를 포개고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미친개도 결국 개잖아. 괜찮아. 내가 길들이면 돼.” 다음 날. 백연은 친구들을 불러 클럽에 갔다. ‘누나'라는 위치는 이미 무의미해졌기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이 클럽은 백진우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이었다. 밤 여덟 시, 백연은 미리 예약해 둔 VIP룸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이미 와 있었고 백연이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눈빛에 감탄이 스쳤다. 예전의 백연도 예쁘긴 했지만 거칠고 고약한 성격 덕에 다들 그녀의 미모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그녀는... 분명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도 유난히 매혹적이고 자연스러운 관능이 흐르고 있었다. “쓰읍, 와, 자기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신은아가 다가와 백연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백연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싱긋 웃었다. “난 원래 예뻤어.” 신은아와 소파에 나란히 앉은 그녀는 손을 크게 휘저으며 양주 몇 병과 맥주 두 다스를 먼저 주문했다. 그러자 신은아가 물었다. “호스트는 몇 명 불러서 놀까?” 클럽에 와서 호스트를 안 부르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클럽의 호스트는 특히 물이 아주 좋았다. 다른 친구들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백연 역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신은아가 매니저를 불렀고 곧 다양한 타입의 호스트들이 하나둘 그녀들이 있는 VIP룸으로 들어왔다. 외모는 전부 수준급에 어깨는 넓고 다리는 길었다. 은은한 조명과 그들의 스타일링까지 더해지니 지금 당장 연예인으로 데뷔해도 될 정도였다. 백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매니저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급히 설명했다. “아, 이 아이는 호스트가 아니라 그냥 서빙입니다.” 친구들은 동시에 남자를 바라보았고 신은아는 눈을 반짝였다. “와... 서빙이라더니 외모가 연예인급이네? 진짜 이런 경우는 희귀한데.” 아쉽게도 몸이 너무 말라 근육은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얼굴 하나만큼은 정성을 들여 꾸민 호스트들을 한순간에 흐려지게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백연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그렇네. 정말 꽤 괜찮네.” 머리를 모두 올린 백진우의 얼굴은 그야말로 최상급이었다. 특히 평소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그 길고 여우 같은 눈매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백연은 매니저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희 룸은 저 직원이 전담하게 해주세요.” 클럽의 VIP룸은 원래부터 일대일 전담 시스템이 있었던지라 매니저는 그대로 그를 남겨 두고 나갔다. 백진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길게 찢어진 눈으로 백연을 흘끗 보았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잠시 혐오가 피어올랐고 하필 여기서 이런 역겨운 여자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소 백진우는 긴 머리로 눈을 가리고 투박한 뿔테 안경까지 썼던지라 어두운 룸 조명 아래서는 백연의 친구들이 알아볼 틈도 없었다. 신은아가 백연의 허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웃었다. “왜? 서빙이 마음에 들었어?” 백연은 대답 대신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큰 웨이브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길고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이 담배 하나를 꺼내 붉은 입술 사이로 물었다. 그 모습에 신은아는 순간 홀린 듯 백연을 보다가 황급히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자기야, 나 다음 생에는 꼭 남자로 태어날 거야.” “내가 남자였다면 널 매일 덮칠 거야. 아니다, 그냥 너랑 침대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흩날리는 뿌연 연기 속에서 백연의 눈매가 흐릿해졌다. 그녀는 신은아의 농담에는 반응하지 않은 채 시선을 계속 백진우에게 고정했다. 직원 유니폼을 입은 흑화하기 전의 악역은 술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고 있었고 짧은 소매 아래 드러난 팔에는 가느다란 힘줄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그쪽, 여기서 서빙으로 일하면 한 달에 얼마 받아?” 백진우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00만 원이요.” 대답을 들은 백연은 입꼬리를 더 끌어올렸다. “너무 적네. 내가 좋은 알바 하나 소개해줄까?” 백진우는 그녀의 의도가 알고 싶어 계속 대꾸해 주었다. “어떤 알바인데요?” 백연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널 키워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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