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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결혼 2년이 되던 그해는 성나정이 유하준을 가장 증오했던 해였다. 그의 생일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한 일은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병원에 가서 유산 수술을 받은 것. 두 번째는 아직 형태도 갖추지 못한 태아를 표본으로 만들어 유하준의 생일 선물로 건넨 것. 상자를 열어본 그의 눈가가 붉어지는 걸 본 성나정은 웃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이 선물... 마음에 들어?” 그제야 성나정은 늘 냉정하고 자기 통제가 완벽하던 그 남자의 얼굴에서 하나하나 ‘가면’이 벗겨지는 걸 똑똑히 봤다. 유하준은 조심스레 상자를 덮어두더니 성나정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번쩍 들어 책상 위에 앉혔다. 이내 몸이 케이크에 파묻히며 크림이 온몸에 묻어났지만 유하준의 눈가는 더 붉어지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성나정, 얘는 네 아이이기도 해. 그 일 때문에 날 이렇게 증오하는 거야?” 성나정은 숨이 잠시 멎는 것 같았고 마음속 깊은 어딘가가 세게 쑤셨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억눌러 버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유하준. 난 널 죽도록 미워해. 우리 집안은 너 하나 때문에 망가졌어.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너만 편하게 살면 안 되잖아.” 유하준의 힘은 점점 세졌다. 그러다 결국 그녀의 치마를 확 젖히더니 어떤 예고도 없이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이게 네가 저지른 살인의 대가야.” 성나정은 찢어질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손톱으로 그의 등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둘은 서로에게 아무런 사랑도, 연민도 없이 뒤엉켜 있었다. 상처가 나고 멍이 들어도 누구 하나 먼저 손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한때는 행복했고 모두가 부러워하던 선남선녀, 딱 맞는 한 쌍이었다. 유하준은 성나정의 집에서 후원하던 고아였고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다. 성나정의 기억 속에서 그와 떨어져 지낸 시간은 한 달을 넘은 적이 없었다. 성격은 차갑고 말수 적은 아이였지만 언제나 그녀에게는 특별했다. 성나정이 다리 아파서 걷기 싫다고 하면 그는 묵묵히 무릎을 굽혀 그녀를 업고 집까지 데려다줬다. 그녀가 생리 때문에 바지가 더러워지면 굳은 얼굴로 직접 씻어 주기도 했다. 행여나 성나정이 아프기라도 하면 중요한 올림피아드 경시대회도 미뤄둔 채 병원에 따라왔다. 그러니 성나정이 유하준에게 빠져드는 건 운명처럼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유하준은 바라던 대로 검찰청에 들어갔고 첫 월급으로 성나정의 집에 두둑한 감사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부모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평생 성씨 가문을 지키고 나정이를 지키겠습니다.” 검찰청의 인턴, 임수아가 수없이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도 그는 단번에 거리를 두었다. “미안하지만 난 약혼자가 있어.” 그러나 결혼식 당일 밤, 임수아가 눈물로 성석진을 ‘강간범’이라며 고소장을 제출했고 유하준은 꼭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성나정은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재판의 가장 중요한 순간, 유하준은 스스로 성석진이 술 취한 임수아를 부축해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담긴 CCTV를 제출했다. 법정은 그 자리에서 성석진에게 강간죄 유죄,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성석진은 법정에서 그대로 쓰러졌고 백 년을 버텨오던 성씨 가문의 저택은 바로 압류됐으며 김나희는 울분에 사로잡힌 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성나정의 집은 완전히 무너졌다. 폭우를 뚫고 온몸이 젖은 채 유하준에게 따지러 갔을 때 그녀는 거실에서 자신의 잠옷을 입고 있는 임수아를 보았다. 그리고 주방에서 소매를 걷고 음식을 만들고 있는 유하준도. 성나정의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차갑고 싸늘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호흡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집안의 모든 걸 집어던졌고 세 사람 사이에는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만 가득했다. 하지만 유하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자신의 결정을 통보하듯 말했다. “판결은 정의를 반영한 거야. 법은 누구도 속이지 않으니까 너도 받아들여야 해. 수아는 아버님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앓고 있어. 그건 성씨 가문이 수아에게 빚진 거고 나는 네 남편으로서 책임을 져야 해.” 그 책임 때문에 그는 임수아의 말 한마디면 언제든 성나정을 버렸다. 성나정은 다른 변호사를 찾아보려 했지만 유하준의 압력 때문에 누구도 성석진 사건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그녀 마음에 남아 있던 한 줌의 사랑은 지독한 증오로 완전히 덮여버렸다. 둘의 관계도 처음의 달콤함과는 달리 이제는 서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만큼 미웠다. 그 모든 걸 떠올리자 가슴과 몸의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성나정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눈을 떠 유하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가 다시 치밀었다. 성나정은 고개를 들어 그의 목을 세게 물어버렸다.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유하준은 피가 나는 목을 움켜쥐고 그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아까의 흥분도 사라진 듯 성나정에게서 떨어지더니 재빨리 옷을 챙겨 입었다. 성나정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고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아직 멀었어.” 유하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뭔가 말하려던 찰나,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내 화면을 본 그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수아야, 무슨 일이야?” 곧 수화기 너머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준 오빠, 나... 그날 밤 일이 또 꿈에 나왔어. 강제로 끌려갔던 거... 지금 너무 무서워서 그러는데 나랑 조금만 같이 있어 줘.” 유하준은 여전히 멍투성이가 된 채 가만히 있는 성나정을 한번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잠깐 망설임이 스쳤지만 결국 그는 의자를 집어 들고 걸으며 대답했다. “곧 갈게.” 그렇게 성나정은 또다시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버려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녀는 울음을 참았지만 소리가 멀어지자 눈물이 터져 나와 얼굴을 적셨다. 이건 유하준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었다. 이제는 그 어떤 감정도 그에게 쓰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성나정은 뻐근한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휴대를 열어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나 곰곰이 생각해 봤어. 백현아, 네 요구 받아들일게. 15일 후, 내가 네 결혼식에 난입해서 그 결혼 못 하게 할게.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 아빠를 꺼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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