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다음 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송찬미는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송은정 역시 간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밤새 위가 뒤틀리는 고통에 몇 번이나 깼던 것이다.
하지만 딸이 걱정할까 봐 소리 한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
딸이 아침을 다 차리고 부르자 그제야 막 잠에서 깬 척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송찬미는 입맛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식사하는 동안 그녀는 엄마가 입원해서 쓸 물건들을 챙겼다.
식사를 마친 송은정이 침실 문을 열었다. 딸 이름을 부르려던 그녀의 목소리는 침대 끝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송찬미의 모습에 그대로 잦아들었다.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송은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딸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그 찰나, 그녀의 뺨 위로도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엄마가 식사를 마치자, 송찬미는 한 손에 짐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엄마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섰다.
아파트 단지를 막 벗어났을 때, 익숙한 마이바흐가 보이자 송찬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기사가 차에서 내려 다가오며 공손하게 말했다.
“송찬미 씨, 대표님께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송찬미는 숨을 멈췄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12월의 새벽 공기는 뼛속까지 시렸고 찬 바람이 불자 엄마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엄마는 지금 면역력이 몹시 약해져서 밖에서 찬 바람을 쐬면 안 되었다.
게다가 이미 사람까지 보냈는데 거절하기도 곤란했고 기사도 돌아가서 보고하기 난처할 터였다.
송찬미는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기사는 그들의 짐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난 뒤,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강릉대병원요.”
“알겠습니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은정이 물었다.
“찬미야, 이 기사님 보낸 사람은 누구야?”
송찬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지영이 오빠요.”
“아, 지영이 오빠구나.”
송은정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영이랑은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니?”
고등학생 때 신지영이 집에 몇 번 놀러 와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신지영은 성격이 밝고 말도 잘하는 데다 예의도 발라서 올 때마다 송은정을 웃게 만들었다. 꼭 작은 태양 같은 아이라 송은정은 그녀를 무척 좋게 기억했다.
송찬미가 답했다.
“네, 연락해요. 곧 귀국한대요.”
신지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갔는데 며칠 전에 곧 돌아온다고 연락이 왔었다.
“그 아이 성격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돌아오면...”
송은정은 원래 그녀가 돌아오면 집에 한 번 초대하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암 투병 사실을 떠올리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송찬미는 엄마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고 가만히 엄마의 손을 주물러주며 말없이 위로했다.
그녀는 카톡을 열었다. 어젯밤 신승우가 보낸 돈을 받지 않고 문자만 한 줄 남겨놓은 것을 발견했다.
[됐어.]
송찬미는 신승우와의 대화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평소에 거의 연락하지 않는 사이였다.
어젯밤의 계좌 이체를 제외하면 그와의 마지막 문자는 석 달 전 그녀의 생일날에 멈춰 있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그 위로는 설날에 그가 보낸 문자가 전부였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오빠도요.]
송찬미는 문자를 작성했다.
[기사님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앞에 ‘승우 오빠’를 붙이고 조금 더 공손하게 보이기 위해 문장을 다듬었다.
문자를 보낸 후, 송찬미는 대화창을 닫았다가 카톡 상단에 고정된 연락처를 보고 숨을 멈췄다.
어젯밤에는 심영준과의 대화창을 정리할 경황이 전혀 없었다.
이제 와서 ‘내 사랑'이라고 저장된 이름을 보니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송찬미는 당장 심영준을 차단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병을 생각하자 망설여졌다.
심영준과 2년을 사귀는 동안, 그녀는 그를 위해 헌신했고 쓰리잡까지 뛰었다.
‘강아지를 2년 키워도 정이 들잖아? 어젯밤, 심영준은 다른 여자에게 6천만짜리 가방도 사줬다지. 만약 내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과연 빌려주기는 할까?’
...
송찬미는 엄마의 입원 수속을 마친 후, 결국 고민 끝에 심영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일어나면 연락 줘. 할 말 있어.]
하지만 오후 2시 반이 되어서야 심영준에게서 답장이 왔다.
[자기야, 어제 친구 생일이라 노래방 가서 좀 늦게까지 놀았어. 다들 갔는데 나만 먼저 나오기가 좀 그랬거든.]
송찬미는 지금 엄마 병원비를 어떻게 마련할까 하는 생각뿐이라, 심영준의 기만과 농락에는 이미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심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 막 잠에서 깬 심영준이 나른하고 섹시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기야.”
예전에는 막 잠에서 깨 몽롱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가장 좋아했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그 목소리가 역겹게만 들렸다.
“심영준.”
송찬미는 그의 이름을 전부 부르며 진지하고 엄숙한 투로 말했다.
“왜 그래, 자기야?”
심영준은 계속해서 그녀를 달랬다.
“왜 자기라고 안 불러? 어제 내가 늦게 들어가서 화났어? 자기야,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화 풀면 안 될까?”
송찬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심영준,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심영준은 몇 초간 침묵하다 대답했다.
“왜 갑자기 돈을 빌려달래? 알잖아, 나... 형편이 어려워서 가진 돈이 없다는 거...”
송찬미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심영준, 엄마가 아프셔서 급하게 돈이 필요해. 제발 어떻게든 방법 좀 찾아봐 줄 수 없을까? 차용증 확실히 쓰고 꼭 갚을게.”
심영준은 또다시 침묵했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송찬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1초, 2초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전화기 너머의 심영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송찬미를 얼음 구덩이에 처박는 듯했다.
“자기야, 지금 나 시험하는 거야? 내 진심을 떠보는 거냐고! 내가 돈만 있었으면 빌려주는 게 아니라 내 모든 걸 너한테 다 줬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정말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어. 자기야, 그런 농담은 하나도 재미없어. 아무리 날 떠보고 싶어도, 우리 엄마 몸 아픈 걸로 장난치는 건 아니잖아.”
송찬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가난한 척 연기하고 있었다.
입만 열면 우리 엄마라고 부르면서 돈 빌려달라는 말에는 모른 척했다.
송찬미는 휴대폰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심영준, 돈 안 빌려줘도 돼. 그럼 그동안 내가 너한테 쓴 돈이라도 돌려줘.”
지난 2년간 심영준에게 쓴 돈은 어림잡아도 육칠백만은 족히 넘었다.
송찬미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과거의 자신이, 사랑에 눈이 멀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은 먹을 거, 입을 거 아껴가며 그에게 돈을 썼다. 패딩 하나를 3년 내내 입으면서도 새것 살 생각은 못 했지만 그가 추울까 봐 망설임 없이 20만도 넘는 패딩을 사줬다.
헛웃음이 나왔다.
돈을 뱉어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심영준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자기야, 지금 장난해? 나더러 돈을 갚으라고? 대체 왜?”
송찬미가 비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네.”
“질렸어?”
심영준의 목소리에는 놀랍게도 상처받은 기색이 묻어 있었다.
“어.”
“자기야, 내가 뭐 잘못했어? 말만 해, 다 고칠 테니까.”
심영준이 비굴하게 애원했다.
“나 버리지 마. 네가 하라는 거 뭐든지 할게. 나 너 없으면 안 돼.”
“진짜?”
송찬미는 자신의 목소리가 비웃음으로 가득한 것을 느꼈다.
“그럼 나 2억 줘.”
“뭐라고?”
심영준은 제 귀를 의심했다.
“2억? 자기야, 나 돈 없는 거 알면서. 헤어지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맞지?”
송찬미의 마음은 잿더미처럼 차갑게 식었다.
“심영준, 재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