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나도윤이 침대 위에서 첫사랑의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이소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더 이상 집엔 그를 기다리는 불빛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가 단골 클럽에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술을 마셔도 예전처럼 이소은이 다급하게 뛰어와 그를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는 어느 날, 동창회 자리에서 나도윤이 게임을 하다 벌칙에 걸려 이성 중 한 명과 함께 빼빼로 과자를 먹게 됐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한유라를 지목했다.
둘은 장난처럼 하나의 과자를 양쪽에서 조금씩 먹어 들어갔고 끝내 입술이 살짝 닿고 말았다.
그 순간에도 이소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다.
게임이 끝나고 박수와 웃음소리 속에서 나도윤은 사람들 틈에 섞여 웃고 있는 이소은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곧장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다가온 그는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단숨에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소은! 너 원래 이런 게임 싫어하잖아. 그래서 너 안 고른 거야. 방금 입술 닿은 건 정말 실수였고, 난 그냥...”
“알아.”
그녀가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굳이 설명 안 해도 돼. 어서 가서 계속 놀아. 분위기 깰 필요 없잖아?”
그 순간, 나도윤은 멍하니 굳어버렸다.
한 달 전부터 이소은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의 귀가 시간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일도 없었으며 그의 주변에 어떤 여자가 있든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지난번 한유라가 발을 삐어 병원에 데려다주고 밤늦게 돌아왔을 때조차도 이소은은 아무 말 없이 먼저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잔잔하고 깊은 호수와 같았다.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는 고요함이 이어졌지만 그 고요함은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서서히 키워 가고 있었다.
“이만 집에 가자.”
목이 타들 듯 메말라온 나도윤이 외투를 집어 들며 말했다.
“넌 원래 이런 모임 싫어했잖아. 내가 데려다줄게.”
“아직 게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이소은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자.”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끌어 일으켰고 주변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그대로 자리를 나섰다. 차에 막 올라타려던 찰나, 창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
나도윤이 창문을 내리자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한유라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띤 채 하늘을 가리켰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구름이 잔뜩 몰려 있었다.
“비 올 것 같아. 근데 택시가 안 잡혀서... 혹시 방향이면 데려다줄 수 있어?”
나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소은이 먼저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물론이지. 아, 맞다. 유라 씨 차멀미 심하니까 앞자리에 앉아.”
나도윤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한유라 역시 당황한 듯 입가의 웃음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놀란 눈빛으로 이소은을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조용히 앞좌석에 앉았다.
“그럼... 고마워.”
차는 어둠 속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고 이내 한유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윤 씨, 기억나? 고등학교 때였나... 비 오는 날, 나 우산 안 가져왔는데 도윤 씨가 말도 없이 교복 벗어서 내 머리에 씌워줬잖아. 정작 자기는 비를 맞으면서 나랑 집까지 같이 걸어가고... 그러다 다음 날 감기 걸렸지.”
“응, 기억나.”
나도윤의 목소리는 낮고 잠긴 듯했다.
“그리고 그때도... 내가 생리통 심하다고 하니까 수업 빠지고 담 넘어가서 약 사 오다가 교감 선생님께 걸려서 조회 때 반성문 읽었잖아.”
“기억나.”
“수능 앞두고 내가 스트레스 심하다고 했을 때는 매일 내 서랍에 학 한 마리씩 접어서 넣어줬지. 격려 문구도 써서. 결국 상자 하나 가득 채웠고...”
“그랬었지...”
그들은 마치 둘만 있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옛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한유라는 말끝마다 두 사람만의 추억을 얹었고 나도윤은 짧지만 빠짐없이 대답했다.
그 사이 한유라는 룸미러 너머로 조수석 뒤에 앉은 이소은을 힐끗 바라보았다.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한 노골적이고도 도발적인 시선이었다.
그러나 이소은은 조용히 앉아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휴대폰 화면을 빠르게 터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도발하고 나도윤과 달콤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데도 이소은은 태연하게 캔디팡을 하고 있었다.
나도윤 역시 룸미러를 통해 이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온전히 게임에 집중한 채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고 꽤 난도가 높은 스테이지에 걸린 듯 완전히 자기 세계에 빠져 있었다. 방금 오간 대화는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짜증이 다시 그의 가슴을 거슬러 올라왔다. 나도윤은 운전대를 꽉 움켜쥔 채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길가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끼익!
본능적으로 그는 핸들을 급히 꺾었고 차량은 그대로 도로 옆 가드레일을 향해 충돌했다. 순간적으로 밀려든 충격 속에서 그는 반사적으로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한유라를 감싸안았고 그와 동시에 뒷좌석의 이소은은 앞으로 튕겨 나가며 이마를 앞좌석 등받이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소은아!”
나도윤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어디 다친 거야? 나 좀 보자!”
“괜찮아.”
이소은은 손등으로 피를 닦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짝 부딪힌 것뿐이야. 집에 가서 약 바르면 돼. 일단 한유라 씨 먼저 데려다줘.”
결국 그는 그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채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한유라를 집 앞에 내려준 뒤, 나도윤은 그대로 차를 몰아 두 사람의 집으로 돌아왔고 문을 열자마자 서둘러 약통을 꺼냈다.
“이소은, 아까는 그게...”
“알아.”
이소은은 그가 내민 면봉을 받아 들고 현관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 상처를 치료했다.
“당신이 유라 씨 옆에 있었으니까 본능적으로 감싼 거겠지.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야. 이해해.”
그녀의 옆얼굴은 너무나 평온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윤의 가슴속에서 한 달 동안 억눌러 왔던 답답함과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그는 그녀 손에서 면봉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
“이소은! 벌써 한 달이야!”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이 뭔지 알아? ‘알겠어’, ‘이해해’, ‘화 안 났어’야! 도대체 넌 뭘 원하는 거야? 아직도 그날 밤 일로 화난 거야? 나 술 취했었어! 그냥 말이 나온 거라고! 사과도 했고 우리 헤어진 것도 아니잖아,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그의 손길에 흔들리며 이소은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부딪힌 상처 부위가 욱신거리며 쑤셔왔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거의 체념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 정말 화 안 났어. 마음에도 안 뒀고.”
“거짓말!”
이소은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맹세할게. 내가 아직도 그 일로 화가 나 있다면 천벌을 받아. 이 정도면 됐지?”
그녀의 눈빛은 맑았고 말투는 단호했다.
어떤 감정도 억지로 꾸며낸 흔적은 없었다.
나도윤은 굳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에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정말... 화난 게 아니었어?’
“그럼 너...”
그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이제 그만 좀 해. 너 예전엔 안 이랬잖아.”
“예전엔 어땠는데?”
“예전엔... 질투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나한테 신경도 써주고 그랬잖아.”
그 말을 들은 이소은은 갑자기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철없고 이해심 없는 거였잖아? 지금이 훨씬 낫지 않아?”
나도윤은 말문이 막혔다.
입술만 달싹였을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욕실로 향했다.
“나 샤워할게.”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욕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이소은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깊은 밤하늘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밝게 켜졌고 새로운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이소은 님, 축하합니다. 국가 연극단 글로벌 투어 최종 주연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이달 말까지 뉴욕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3년간의 세계 순회공연 준비에 들어갑니다. 개인적인 일정은 사전에 정리해 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끝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고 이내 천천히 시선을 욕실 쪽으로 옮겼다.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 너머로 샤워 중인 그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고 쏴 하는 물소리는 끊임없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소은은 그제야 자신이 정말로 더는 화가 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소은은 정말로 더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화내지 않는 이유는 그를 더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