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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한유라의 얼굴에 걸려 있던 자신만만한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소은을 바라봤다. 전에도 그랬다. 차 안에서 일부러 나도윤과 옛 추억을 꺼냈을 때, 이소은은 옆자리에서 캔디팡을 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도발했는데도 이소은은 화는커녕 반박 한마디 없이 네 말이 맞다고 했다. 한유라는 아무 반응 없는 이소은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속이 뒤집혔다. ‘이 여자 진짜로 아무 감정 없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면서 더 고단수의 수를 두고 있는 건가. 한유라가 뭐라고 더 비아냥거리려는 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해요! 비켜요!” 스키장에서 묘기 타기를 하던 한 사람이 균형을 잃은 듯, 무서운 속도로 그들 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이소은, 한유라. 조심해!” 나도윤의 다급한 외침이 스키장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이소은과 한유라는 동시에 놀라,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눈앞에서 점점 커지며 다가오는 실루엣을 인식한 순간, 나도윤은 마치 포효하는 야수처럼 휴게실을 박차고 나와 광속으로 달려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유라의 팔을 거칠게 낚아채더니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감싸안은 채 눈밭 옆 안전지대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바로 옆, 불과 두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는 이소은이 서 있었고 그녀는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서 나도윤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 안에는 오직 한유라만이 있었다. 그 순간, 이소은은 자신을 향해 거대한 충격이 한꺼번에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무게중심을 완전히 잃은 채 눈 위를 굴러떨어졌고 그 과정에서 스키판은 발에서 벗겨져 나가고 고글은 어디론가 튕겨 나갔다. 차갑게 부서진 눈 알갱이들이 입과 코안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귀는 멍해진 채 온몸이 비틀리듯 뒤엉켜 통증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뒤통수가 딱딱한 무언가에 세게 부딪히며 둔탁한 충격이 머릿속 깊숙이 퍼져 나갔다. 그녀는 그렇게 새하얀 눈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듯 어둠에 잠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병실 천장의 형광등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함께 몸은 납처럼 무거웠고 머리는 둔하게 욱신거렸다. 이소은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흐릿한 의식을 붙잡았다.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려는 찰나, 문밖에서 낮지만 억눌린 분노가 섞인 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게 네가 찾은 예비 남친이야? 너 위험할 때 그 자식은 옆에 있었는데, 구하러 오지도 않았잖아. 당장 정리해!” 나도윤이었다. 그 분노 섞인 목소리를 그녀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한유라가 맞받아쳤다. “그건 못 봐서 그런 거라고! 이현 오빠, 괜찮은 사람이야. 게다가 내 일이잖아. 도윤 씨가 뭔 상관인데? 도윤 씨 여자친구, 지금 병실에 누워 있잖아. 가서 걔나 챙겨.” “한유라!” 이젠 성까지 붙여 부르며 그 분노가 한계에 닿아 있었다. “너, 지금 일부러 날 자극하는 거지? 넌 내가 왜 이소은을 여자친구로 삼았는지 뻔히 알잖아.” “왜, 왜 그랬는데? 한 번 말해 봐. 왜!” 한유라가 소리를 질렀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원 복도 끝까지 퍼져 나갔다. 나도윤은 입을 다문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잠시 침묵 끝에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냐.” “하.” 한유라가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 “됐어. 나, 이현 오빠랑 밥 먹으러 갈 거니까 도윤 씨 여자친구나 잘 챙겨.” “너, 감히 가기만 해 봐.” “가는 건 내 자유야. 잘 있어, 나도윤.” 하이힐이 바닥을 찍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 직후 주먹이 벽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고 복도에는 잠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뒤,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간호사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아, 깨어나셨네요. 괜찮으세요? 어지럽진 않으세요?” 문밖의 소란은 어느새 잦아들더니 잠시 뒤 나도윤이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는 이소은의 곁으로 다가와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깨어났네.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의사 말로는 가벼운 뇌진탕이래. 몸에도 타박상이 좀 있어서, 며칠 입원해야 한대.” 간호사가 검진을 마치고 나가자 병실엔 단둘만 남았다. 나도윤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건 상황이 급박해서 나...” “알아.” 그의 말을 이소은이 먼저 끊었다. 목소리는 아직 약했지만 톤은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 “당연히 착각했겠지. 원래 날 구하려 했는데 그냥 잘못 보고 한유라를 구한 거잖아.” “이해해. 굳이 해명 안 해도 돼.” 그 말에 나도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미리 준비했던 사과와 안심시키려던 말들이 전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소은은 그가 어떤 말을 꺼낼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보다 먼저 그의 변명이 들어올 틈조차 없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상처받지도 않았다. 그 무심함이야말로 나도윤에게는 가장 잔혹한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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