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정하루는 송난시에서 가장 화려하게 피어난 붉은 장미 같은 존재였다.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인 정하루는 눈길 한 번 주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녀에게 홀린 남자들이 줄을 서면 송난시를 한 바퀴 두르고도 남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정하루 본인은 그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하루의 친구가 내기를 걸었다.
“하루야, 만약 네가 우리 유환 삼촌을 꼬실 수 있다면 내 차들 중에 한 대 골라서 가져.”
정문 그룹 대표인 도유환은 냉정하고 금욕적이며 고고하고 오만한 성격으로 수많은 여자들이 원하는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인간 여자뿐만 아니라 암컷 모기조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고 한다.
정하루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손에 넣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와 내기를 한 날, 정하루는 약을 탄 술을 마신 도유환과 마주치게 되었다. 원래도 그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던 정하루는 그렇게 얼떨결에 그와 관계를 가졌다.
그날 밤 이후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것 같지 않았던 도유환이 정하루에게만큼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
3년 동안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화목했다.
정하루는 그와 몸정을 쌓으면서 점점 그에게 마음까지 내주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넘보지 못할 상대인 도유환이 자신의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오늘 밤, 차에서 그와 관계를 가진 뒤 정하루는 도유환의 푸른색 커프스단추가 떨어진 걸 보고 그걸 주워서 도유환에게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복도 끝에 있는 룸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정하루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환아, 너 정하루랑 즐기다가 왔지? 정하루 걔도 참 신기해. 평소에는 고양이처럼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도도하게 굴더니 네 앞에서는 애교를 부리면서 얌전해지잖아. 정말 부러워 죽겠어. 그래서 걔랑은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야?”
정하루는 걸음을 멈추며 왠지 모르게 긴장했다.
그리고 이내 너무나도 익숙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섹파랑 어떻게 결혼을 해?”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것은 더없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정하루의 심장을 찔렀다.
룸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도유환의 친구들조차 한없이 잔인한 그의 태도에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잠시 뒤, 누군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깨부셨다.
“농담이지? 너희 3년 만났잖아... 너... 너 설마 혹시 아직도 그 여자를를 잊지 못한 거야?”
정하루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도유환에게 못 잊는 여자가 있었다니.
정하루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문밖에 가만히 서서 도유환의 덤덤한 목소리를 들었다.
“응. 우리 헤어질 때 걔가 나한테 그랬어. 3년 동안 둘 다 다른 사람을 한 번 만나보자고. 3년 뒤에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면 다시 사귀기로 했지. 걔는 원래 좀 많이 불안해하는 편이라서 나도 그러자고 했어.”
“이젠 3년이 됐고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도유환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아주 약간의 기대 어린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이젠 걔도 돌아올 때가 됐어.”
정하루는 마치 날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고 손끝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3년 동안 그를 만나면서 서로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 적이 수도없이 많았는데, 도유환에게는 언제든 끝낼 수 있은 가벼운 관계일 뿐이었다.
“그러면 정하루는 어쩌려고? 걔 자존심 강하잖아. 만약 그 사실을 안다면...”
쾅!
남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하루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며 문가를 바라봤다.
정하루는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눈동자가 빨갰다.
정하루는 상석에 앉아 있는 도유환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도유환은 단정한 정장을 입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여유롭게 앉아 있얼다.
그는 정하루가 갑자기 나타났음에도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고 평소와 똑같이 차분하고 냉담한 모습을 했다.
그러나 그런 냉정한 모습이 오히려 정하루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되었다. 도유환이 그녀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절대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정하루는 도유환의 앞으로 걸어가 자신이 3년간 사랑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뗐다.
“도유환 씨,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도유환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얼굴로 정하루를 바라보았다.
“할 말 없어. 네가 들은 게 맞아. 우리는 섹파야.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너 시율이랑 내기했었잖아. 나랑 만나면 걔 차들 중에 원하는 거 한 대 가지기로. 그걸로 부족하면...”
도유환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정장 안쪽에서 검은색 카드를 하나 꺼내 정하루의 앞에 있는 태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안에 200억 들어 있어. 3년 동안... 내가 부를 때마다 달려와 준 대가로 생각해.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아무 사이 아닌 거야.”
말을 마친 뒤 도유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도유환이 곁을 지나치는 순간 정하루가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정하루의 손이 차가웠다. 그녀는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손에 힘을 주었다.
도유환의 걸음이 멈췄다.
언제나 도도함을 잃지 않던 정하루가 이 순간만큼은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낸 듯이, 그가 유일한 동아줄이라도 된 듯이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진짜 유환 씨를 좋아했어요.”
정하루는 어느샌가 도유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정하루도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겨울에 슬리퍼를 신는 것을 귀찮아할 때 도유환이 쭈그려 앉아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슬리퍼를 신겨주던 때였을 수도, 맹장염 수술을 받고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이 다크써클이 턱 끝까지 내려온 도유환의 얼굴을 보았을 때 였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회식이 끝나고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왔어도 정하루가 번개가 치는 걸 무서워한다는 걸 기억하고 그녀를 품 안에 안았을 때였을 수도 있다.
그런 한없이 사소한 것들이 한데 모여 거센 파도가 되더니 정하루를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지금 도유환은 태연한 얼굴로 정하루에게 그녀는 단지 섹파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가?
도유환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도유환이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하자 방금 도착한 문자가 정하루의 눈에 보였다.
[유환 씨, 3년 됐어요. 난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보려고 해봤지만 내가 사랑하는 건 결국 유환 씨였어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만나요.]
그 순간 정하루는 하늘이 두 쪽 나는 기분을 느꼈다.
정하루의 시선이 화면에 잠깐 머물렀다. 곧이어 도유환은 자신의 손을 잡은 정하루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미안.”
도유환이 말했다.
“난 너를 좋아한 적 없어.”
말을 마친 뒤 그는 미련없이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