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정하루를 제외한 네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거실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정하루는 그들과 화목한 가족인 척 연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정원으로 나갔다.
살짝 서늘해진 여름의 밤바람도 답답한 정하루의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줄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해은도 따라서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부드러우면서도 눈부신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루야, 너 혼자 여기서 바람 쐬고 있는 거야?”
정해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녀의 말투는 굉장히 도발적이었다.
“사실 네가 왜 화가 났는지 알아. 내 친구들이 얘기해줬거든. 너랑 유환 씨 3년 동안 만났다는 거.”
정하루는 정해은을 등지고 있다가 몸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걱정했어.”
정해은은 정하루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화려하지만 창백한 얼굴을 살펴봤다.
“우리 하루는 워낙 예뻐서 남자들이라면 네 미모에 정신을 못 차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얼굴도 별로 소용이 없더라고. 네 엄마는 우리 엄마를 이기지 못했고, 너도 결국엔 나를 이기지 못했잖아. 지난 3년 동안은 내가 너 불쌍해서 봐준 거야. 이젠 내가 돌아왔으니 내 대체품이었던 너는 이제 필요 없어졌지.”
정하루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달빛 아래 그녀의 눈빛은 깜짝 놀랄 정도로 밝았으며 정해은이 예상했던 분노나 슬픔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오로지 싸늘한 경멸만이 담겨 있었다.
“불쌍하다고? 내가?”
정하루는 또박또박 말했다.
“정해은, 해외에서 오래 살더니 자기 신분 따위는 다 잊었나 봐? 너 남의 가정 파탄 낸 내연녀 엄마 때문에 여기 들어온 사생아잖아. 역겹게 가련한 척 연기나 해서 남자들 꼬시는 게 감히 내 앞에서 날 불쌍하다고 해? 네 엄마는 우리 엄마가 버린 쓰레기를 주웠고 넌 내가 버린 남자를 주운 거야. 그러고 보면 너랑 네 엄마는 진짜 같은 핏줄 맞나 봐. 남이 버린 것만 주워가는 걸 보면 말이야.”
“너!”
정해은은 미소가 굳은 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정하루가 이런 상황에서조차 기가 죽지 않을 줄은 몰랐다.
“내가 뭐?”
정하루는 정해은에게 다가가며 사나운 기세로 말했다.
“넌 네가 이긴 줄 알지? 아니. 넌 그냥 내가 가지고 놀다가 버린 남자를 주운 것뿐이야. 그런데 그걸 보물처럼 여기면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는 거라고. 정해은, 넌 결국 그 정도 수준의 인간이야.”
정해은은 정하루의 반격에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녀가 지금껏 유지해 온 온화한 가면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정하루는 더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정해은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그녀는 정원에 있던 의자에 이마를 박아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해은아!”
도유환, 정명진, 임선경이 거의 동시에 거실에서 뛰쳐나왔다.
정해은은 바닥에 쓰러져서 피가 흐르는 이마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빠, 엄마, 유환 씨... 하루 잘못 아니에요. 제가 중심을 잘 잡지 못해서...”
임선경은 곧바로 딸을 안고 울부짖었다.
“해은아, 우리 딸! 너 왜 이렇게 바보 같아? 하루가 너한테 이런 짓까지 했는데도 하루 편을 드는 거야?”
정명진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정하루를 손가락질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정하루! 이 불효녀 같으니라고! 네 언니한테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정하루는 그 자리에 서서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정하루의 시선이 화를 내는 아빠, 가식적인 계모,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유환에게로 향했다.
도유환은 정해은의 옆에 쭈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까만 눈동자로 정하루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평온하지 않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순간 정하루는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도유환도 그녀를 믿지 않았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정해은을 사랑하는 그가 무엇 때문에 정하루를 믿어주겠는가?
정하루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경악으로 물든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앞에 놓여있던 화분을 들어 조금 전 찢어진 정해은의 이마를 가격했다.
쨍그랑!
그 소리와 함께 정해은의 처참한 비명과 사람들의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잘 들어요.”
정하루는 손에 힘을 풀어 깨진 화분 조각을 버린 뒤 섬뜩할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내가 그런 게 아니지만 이건 내가 그런 게 맞아요.”
정하루의 눈빛은 독을 품은 듯했다.
다들 넋이 나갔다. 도유환도 마찬가지였다.
정하루가 부서진 화분을 내동댕이치고 몸을 돌렸는데 갑자기 누군가 억센 힘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고 그 탓에 정하루는 매우 아팠다.
도유환은 정하루를 붙잡고는 한없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정명진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정 회장님, 따님께서 이런 짓을 했는데 제대로 혼내지 않는다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정명진은 정해은이 안쓰럽고 또 도유환이 두려워서 서둘러 굽신대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불효녀를 제대로 혼내겠습니다!”
정명진은 곧바로 경호원을 불렀다.
“당장 정하루를 사당으로 끌고 가서 무릎 꿇게 해!”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정하루는 저항하면서 날 선 눈빛으로 정명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정명진은 도유환을 바라보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물었다.
“대표님, 사당에서 무릎 꿇고 반성하게 하면...”
도유환은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정해은을 안고서 싸늘한 눈빛으로 정하루를 바라본 뒤 더없이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너무 가벼운 처벌이네요. 아까 서재에 채찍이 걸려 있는 게 보이던데 그거 그냥 장식품은 아니죠?”
말을 마친 뒤 도유환은 정해은을 안고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성큼성큼 떠났다.
그렇게 도유환은 정명진에게 채찍으로 정하루를 때리라고 암시하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