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채시아가 선글래스를 벗더니 비아냥 거리는 시선으로 여름을 쳐다보았다. “잘 됐네. 계속 이렇게 둘러대면서 살 수는 없지. 꼭 이렇게 직접 다 까발려야 되겠니? 정말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애네.” 그 얼굴을 보니 여름은 자신의 인생이 갑자기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선우도 채시아도 오로지 자신이 상속녀라는 것만 보고 만났던 것이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윤서가 분노했다. “예전에 진가은이 자기를 얼마나 괴롭혔는지도 잊고, 애초에 여름이가 곡을⋯.” “됐어, 옛날 얘기 그만해. 이제 나랑 쟤는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야.” 채시아가 다급히 말을 끊었다. “임윤서, 세상에는 주변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이 있어. 멀리하는 게 좋아.” “시끄러워. 친구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도와주는 거지 버리는 게 아니야!” 윤서가 소리 질렀다. “그냥 말 섞지 말자.” 여름이 냉랭한 얼굴로 윤서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우리 밥 먹으러 온 거잖아, 가자.” 세 사람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윤서가 여름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쟤 미친 거 아니니? 네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아니었으면 지금의 시아가 있었겠냐고? 진가은이 전에 얼마나 저를 괴롭혔는데, 같이 노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네.” 여름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넌 화도 안 나니? 막 욕이 나오지 않아?” “욕하면 뭐가 달라지니?” 여름은 쓸쓸하게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냥 이게 내 현실이지. 낳아준 부모님도, 죽마고우로 자란 선우 오빠도 날 버렸어. 가족도, 애인도, 직업도 없는데 오죽하겠어.” 그런 여름을 보고 있자니 윤서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화도 났다. “아빠가 그러시더라. 강여경 밑에서 일하려면 TH에 남고 아니면 나가라고.” 여름이 서글프게 웃었다. “그러기 싫대서 쫓겨난 거야.” 윤서가 위로했다. “됐어. 네 실력이면 어디서든 잘 될 거야.” 그러고 있는데 직원이 두 사람을 막아 섰다. “실례합니다, 예약은 하셨나요?” “네, 네. 실장님하고 통화했어요.” 윤서가 카운터에 있는 실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류 실장이 얼른 다가왔다. “오셨어요? 룸 마련해 뒀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이때 진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 실장, 나 친구들이랑 밥 먹으러 왔는데, 룸 있어요?” 류 실장이 흠칫하더니 뒤로 보이는 시아를 보고 반색을 했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가수 시아님 아니십니까?” 채시아가 방긋 웃었다. 진가은이 피식 웃었다. “보는 눈은 있으시네. 내가 시아한테 이 집 음식이 맛있다고 했거든요. 마침 오늘 시간이 나서 데리고 왔어요.” 류 실장은 뜻밖의 칭찬에 기뻐했다. “시아님 노래 좋더라고요. 저도 완전 팬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쉽게도 룸이 꽉 찼네요.” “방금 룸이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진가은이 강여름 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윤서가 버럭했다. “우리가 미리 예약해 놓은 거야. 밥 먹을 생각이었으면 너희도 예약을 했어야지,” 류 실장은 동성의 명문가 상속녀들 사이에 끼어 곤란해졌다. 진가은이 냉소를 짓더니 강여경을 가리켰다. “류 실장이 이제 시아는 아실 테니 이쯤 하고. 이쪽은 잘 모르실 텐데, TH디자인그룹 회장님 댁의 강여경 씨, TH 상속녀. 임윤서가 데려온 저쪽은 우리 강여경 씨의 비서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류 실장이 흠칫 놀랐다. TH라면 꽤 규모가 큰 기업으로 동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회사였다. 진가은은 건드리면 골치 아픈 인간이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보니 윤서 쪽이 기울어 보였다. 윤서가 소리를 질렀다. “누굴 더러 비서래? 남의 것이나 뺏어 가는 날강도 주제에!” 강여경의 안색이 바뀌었다. 진가은이 류 실장을 빤히 보며 씩 웃었다. “그래서 룸이 있어, 없어?” “있지요, 있습니다.” 류 실장은 순식간에 결단을 내렸다. “실은 제가 JJ영애께 먼저 룸을 잡아드리기로 약속을 해서요. 다, 다음에 다시 오시지요,” 여름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류 실장님, 우리가 바보인 줄 아나 보네요.” 윤서가 옷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 임윤서가 그렇게 만만한 인간인 줄 알아요? 우리 오빠한테 전화 걸어서 장사도 못하게 할까보다, 그냥.” 강여경이 웃었다. “류 실장님은 걱정 마세요. 우리가 다 책임질게요.” 그 말을 듣더니 류 실장이 더 대담해졌다. “제가 남 밑에서 일한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다른 분들 식사 방해하지 마시고 나가주시죠.” “내가 언제 무시를 했다고⋯. 오늘 내가 못 먹으면 아무도 밥 못 먹는 줄 알아.” 윤서가 옆에 있던 화병을 집어 냅다 던졌다. 류 실장은 안색이 변하더니 직원에게 말했다. “저 분들 어서 밖으로 모셔.”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여름과 윤서는 힘 좋은 직원들 손에 잡혀 나갔다. 어찌나 우왁스럽던지 하이힐을 신고 있던 여름은 결국 균형을 잃더니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어날 기회도 주지 않고 직원들은 그대로 여름을 질질 잡아 끌었다. 무슨 푸대 자루라도 된 것 같았다. “놔!”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목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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