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여름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출근하신 뒤일 터였다. 여름은 2층으로 올라가 주민등록증을 들고 나왔다. 거실로 들어서려다가 서류를 가득 안고 서재에서 나오던 강여경과 마주쳤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 머리, 수수한 차림새, 때 묻지 않은 청순한 모습이었다. “돌아왔구나, 여름아. 어제 일 때문에 걱정 많이 했어.” 강여경이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일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 여름의 눈이 싸늘해졌다. “됐어.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착한 척 할 거 없어. 내가 그쪽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 “그러지 마라, 얘.” 강여경이 또륵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네가 원하는 건 다 양보할게. 회사 일에도 손대지 않을 거고. 이 자료 다 네가 보렴.” 그러면서 자료를 모두 여름에게 안겼다. 여름은 얼떨결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서류는 모두 화르륵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서 뭐 하니?” 이정희가 2층에서 내려오다가 마침 눈물이 그렁그렁한 강여경과 흩어진 서류를 보게 되었다. “그거 아빠가 보라고 한 서류 아니니?” “엄마, 제가 실수한 거예요. 화내지 마세요.” 강여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여름이가 회사 일에 손대지 말래서 서류를 주려다가 그랬어요. 선우 일로도 속상할 텐데 회사 일은 그냥 여름이에게⋯.” “뭐라는 거야, 지금⋯?” “시끄럽다.” 이정희가 눈을 치켜뜨고 여름을 돌아봤다. “언제부터 네가 회사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했니? 나랑 아빠가 언니에게 보라고 준 자료다. 다음 주부터 언니가 팀장으로 들어갈 거야. 넌 물러나 있어.” 여름은 깜짝 놀랐다. “학력도 내가 더 좋고 경력도 내가 더 많아요. 1년 먼저 들어간 제가 아직 대리도 못 달았는데 어떻게 늦게 들어온 사람이 팀장을 맡아요?” “엄마, 저는 팀장 같은 거 안 한다니까요. 더는 여름이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강여경이 울먹이며 말했다. 이정희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이거 봐라. 여경이는 그저 네 생각뿐인데, 너는 심보가 그렇게 꼬여서 사사건건 애를 물고 늘어지고. 그따위 심성으로는 팀장 못한다. 선우 마음이 왜 돌아섰는지도 잘 알겠구나.” 날카로운 어머니의 말이 비수처럼 여름에게 날아와 꽂혔다. ‘다 똑같은 딸인데 왜 이렇게 편애를 하는 걸까. 강여경이 하는 말은 다 믿어주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어릴 때부터 키워준 엄마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여름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나도 사람인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노가 치솟았다. 여름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제가 그렇게 싫으면 제가 이 집을 나가면 되잖아요.” 여름은 그 길로 방으로 가 트렁크에 옷가지를 쑤셔 넣었다. 문가에서 강여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여름이 화났어요. 좀 달래보세요.” “내버려 둬라. 원래 그런 애야. 오냐오냐해줬더니 버르장머리가 아주 그냥⋯. 며칠 지나면 기어 들어오겠지. 가자, 약혼식에 입을 옷 맞추러 가야지.” “⋯⋯.”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손등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름은 트렁크를 싣더니 차를 몰고 집을 떠났다. 뭔가를 잃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다들 나에게 왜 이러는 건지.’ 핸들을 꽉 움켜쥔 여름의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 ****** 40분 뒤. 구청 입구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남자는 꽤나 눈에 띄었다. 여름은 차를 세우고 얼른 다가갔다. “정말 오셨네요?” 목소리에 살짝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최하준은 돌아서다가 여름의 몸에서 풍기는 알코올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샤워 안 했습니까?” 순간 여름은 민망해졌다. “어제 너무 마셔서 쓰러져 잤고 아침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최하준의 눈에 떠오르는 혐오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얼른 맹세하는 시늉을 했다. “오늘은 정말 예외적인 날이에요. 평소에는 매일 샤워하는 깔끔한 여자라고요.” 이렇게 말하면서 여름은 최하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바에서는 흐릿한 조명에 멋있어 보이지만 대낮에 다시 보면 영 아닌 사람도 많은 법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눈코입이 반듯하고 눈썹이 그린 듯 말끔했다. 모공도 하나 없이 피부도 깨끗했다. 혼인신고를 하러 가는 어느 남녀의 시선이 최하준에게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저 남자 너무 잘 생기지 않았어?” 여자가 곁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여자도 만만치 않은 걸.” “그러네.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인물 대단하겠는데.” “⋯⋯.” 들려오는 대화를 듣더니 최하준이 말했다. “애는 안 가질 겁니다.” 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최하준이 말했다. “3년 뒤에 이혼할 겁니다. 평생 먹고살 걱정이 없을 정도로 위자료는 드리겠습니다. 당신 가족들과는 만나지 않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동의하지 않으면 지금 바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여름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해서 결혼하자는 게 아니었다니⋯. 됐어. 아니면 아닌 거지, 뭐. 3년 동안 나의 매력으로 남자 하나 공략 못 할까?’ 여름은 어쨌거나 한선우의 외숙모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좋아요.” 두 사람은 구청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한참을 찍었는데도 사진사는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사이 좋게 조금 더 붙으세요. 그리고 선생님, 좀 웃어주세요.” 최하준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여름이 얼른 최하준에게 팔짱을 끼며 눈웃음을 지었다. “안면신경마비가 와서요. 난처하게 하지 말고 그냥 찍으시죠.” “⋯⋯.” 모욕을 당한 최하준은 싸늘한 눈으로 곁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찍고 싶은 거 아니면 아무 말 하지 마시죠.” 여름은 조금도 쫄지 않고 까치발을 들고 최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부드러운 숨결이 귓가에 스치자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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