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5화
밤, 고급 룸살롱.
이주혁이 간신히 하준을 찾아냈을 때 하준은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그 정신에도 손에 든 술잔을 입에 넣고 있었다.
“그만 마셔. 속 다 버린다.”
이주혁이 술병을 빼앗았다.
“내 놔.”
하준은 취해서 다 풀린 눈을 하고 가슴을 탕탕쳤다. 그리고는 잠긴 소리로 내뱉었다.
“위장이라도 아파야 여기 아픈 게 더 느껴진다고. 난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여름이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을까?”
이주혁은 복잡한 눈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하준을 안지 오래지만 하준이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정말 울잖아?’
“그런 소리 하지 마.”
이주혁이 하준의 옆에 앉았다.
“육민관이 함정에 빠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잖아.”
“이게 다 지안이가 계획한 일일까?”
하준이 멍하니 이주혁을 바라보았다.
“의심하고 싶진 않은데, 지안이가 육민관의 손가락이 가지고 싶다고만 하지 않았으면 난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백윤택이 변호를 맡아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법정에 서는 일도 없었을 거야. 이런 것들 때문에 난 여름이랑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어.”
“나도 모르겠다. 정말 지안이가 그랬다고 한다면 정말 이건 뭐 공포 그 자체다. 사람 목숨을 걸고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하지만 납치범으로 의심되는 그 둘은 지금까지 요만한 단서도 없잖아. 지안이랑 백윤택이 그 정도 능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주혁이 술을 한 잔 털어 넣었다. 백지안과 함께 자란지라 이주혁의 마음속에 백지안은 여전히 귀여운 여동생처럼 순수하고 깨끗하고 착한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일을 보고 나니 그 백지안이 이미 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걔가 아니라면 또 누가 육민관을 이용해서 나와 여름이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겠어?”
하준도 의심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을 지안이 계획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지안이가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건 발생 후 지안이와 백윤택이 목적을 가지고 나랑 여름이 사이가 벌어지도록 부추긴 것은 사실이야.
지안이가 사고 난 것이 너무나 안쓰러운 나머지 이 문제를 이성적으로 생각을 못 했던 것이 너무나 아쉽구나’
“원래 게임은 하고 있는 사람은 정신을 못 차리고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더 상황파악을 잘 하는 법이지.”
하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왜 어르신이 영식이를 잡아 가두시고 난리인가 했더니 어르신은 이걸 다 꿰뚫어 보고 계셨는지도 모르지.”
“그러게. 영식이 그 성질이었으면 육민관을 살려두지 않았을지도 몰라.”
이주혁도 생각할수록 섬찟했다.
대체 어떤 세력이 뒤에서 조종을 하고 있길래 평소 비즈니스계에서 냉정하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최하준, 이주혁, 송영식 세 사람을 백지안을 이용해 이렇게 정신을 잃게 만들었는지 무서웠다.
“주혁아, 앞으로는… 지안이를 조심해라.”
하준은 온몸으로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이 사건이 지안이랑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일이 단순하지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야.”
“너나 조심해. 네가 지안이에게 제일 많이 얽혀있었잖아.”
이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도 영식이는 영원히 못 믿겠지.”
“그냥 냅둬. 하지만… 앞으로 영식이가 여름이를 괴롭히지는 못하게 해야지.”
하준은 그렇게 말하더니 매우 서글픈 얼굴이 되었다.
“하긴, 상처는 내가 제일 많이 줬지.”
“포기해라. 이제 강여름은 그냥 냅둬.”
이주혁은 불현듯 자신이 강여름에게 했던 지나친 일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속으로는 여름을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서 송영식처럼 지독하게 대하지 않았었다.
여름이 백소영가 친하게 지낸 후에는 영 마뜩잖아서 강여름을 눈엣가리처럼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너무 했었나 싶었다.
“아니야. 난 가서 용서를 빌어야겠어.”
하준이 술병을 빼앗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속이 견디지 못할 때까지 술을 마시더니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왈칵 토하고 말았다. 어찌나 심하게 토했는지 피가 다 비칠 지경이었다.
“이런, 젠장.”
이주혁은 얼른 하준을 병원으로 옮겼다.
위천공이라는 진단을 받고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