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화

여름은 담담히 웃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벨레스와 아무 관련이 없어요. 이제는 최 대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한마디만 하자면 서경주 부녀의 힘으로는 기시다를 이길 수 없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는 여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곧이어 서유인이 병실에서 뛰어나와 다급히 추성호의 소매를 잡았다. “어떡해? 큰아버지가 곧 죽어도 주식을 팔 생각인가 봐. 이제 이걸 어떡해?” 추성호는 빠르게 계산을 굴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절대 기시다를 이사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어. 더구나 벨레스 내부 일에 끼어들게 만들 수는 없지. 그대로 두었다가는 벨레스 사람들은 모두 공중에 붕 뜨게 될 거야. “기시다가 얼마나 교활한지 몰라. 당신은 기시다의 적수가 못 돼. 그러니 당신 아버지가 얼마나 하실 수 있을지 봐야지. 만약 아버님이 못 버티신다면….” 추성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과 당신 아버지는 그저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이나 바라보고 있어야겠지 그나마도 저쪽에서 주겠다는 만큼만 받을 수 있을 거야.” “싫어….” 서유인은 놀라서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내 남편이니까 날 도와줄 거지? 우리는 이제 운명 공동체잖아. 그리고 추신이랑 벨레스가 그간 협력을 밀접하게 해 왔는데 벨레스에서 내 지위가 없어지면 우리 공동 투자 회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거 아냐?” “이를 말인가? 나도 그게 걱정이라고.” 추성호가 서유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할까? 당신을 도와줄 수 있게 명희를 보내줄게, 어때?” 서유인은 살짝 망설여졌다. 진명히는 추성호의 비서였다. 서유인은 사실 추성호의 사람이 너무 벨레스에 깊숙이 침투하는 것은 좀 꺼려졌다. “여보, 이제는 우리 둘이 손을 잡고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할 때야.” 추성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남편으로서 나는 우리 와이프의 집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 이번 일을 통해서 우리 아버님이 벨레스를 든든히 장악하셨으면 좋겠어.” “알겠어.” 서유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자신은 아내이니 추성호가 반드시 자신과 함께 기시다에게 맞서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서유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추성호의 눈은 점점 음흉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추성호는 바로 진명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수를 쓰던 기시다 사장과 연락을 해 봐.” “무슨 일이십니까. 대표님?” “협력이다.” 추신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진명희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기시다 사장하고는 일면식도 없는데 어떻게 협력을 하시게요?” “미끼만 충분히 던져주면 적도 친구가 되는 법이지.” 추신호는 싸늘하게 웃었다. “서유인 부녀는 이제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벨레스 주식 몇 개 있는 것뿐이야. 절대 기시다의 적수가 되지 못해. 반면 기시다는 배후에 다국적 기업이 있으니 협력하면 윈윈할 거야. 자네를 이미 서유인의 곁에 둘 수 있도록 얘기해 놨어. 2달 안에 기시다에게 연락해서 벨레스를 우리 둘의 것으로 만들어 놓도록 해.” 진명희는 추성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싸해졌다. ‘사람들이 최하준의 수단이 매섭다지만 진정으로 무서운 사람은 추신 쪽 사람들인지는 모른단 말이야. 권력을 위해서라면 아내도 발판으로 삼아 버리는구나. 정말 무섭다.” ---- 병실 안. 상혁은 하준에게 보고하고 있다. “강 대표님은 서신일 전 회장이 회의 중에 쓰러져서 병원으로 이송되면서 따라오셨다고 합니다.” “서경주가 주식을 팔아 치운 것 때문에?” 최하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벌써 소문이 다 퍼졌더라고요. 온 재계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상혁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벨레스에 천지개벽이 일어나겠습니다.” “그것도 괜찮지. 추신과 벨레스는 너무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어. 추신의 의도를 파악하고 여름이가 말려들지 않고 현명하게 잘 빠져나온 거야.” 하준의 창백한 얇은 입술이 씩 웃었다. 상혁은 어이가 없었다. ‘강 대표님과 헤어졌는데도 무슨 남자친구처럼 말씀을 하시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