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이때, 박은성도 그를 발견했다.
녀석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고 이모마저 가버린지라 속상한 마음에 투덜거렸다.
“아빠, 왜 이제 와요? 예쁜 이모가 가버렸잖아요.”
부루퉁한 아들을 보자 박태진은 일단 따라가기를 포기했다.
어쩌면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
떠난 지 벌써 6년인데 종무소식인 여자가 당최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이제 와서 나타날 리 있겠는가?
박태진은 정신을 차리고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예쁜 이모? 네가 전화로 얘기했던 그 명의?”
“네!”
박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소원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얼굴에 실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금 쫓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으려나?
아들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박태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미 갔는데 어떡하겠어.”
그는 녀석이 진짜 명의를 찾았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뒷모습만 봐도 꽤 어린 듯싶었다.
실력이 좋아봤자 거기서 거기이지 않겠는가?
어찌 됐든 병원장한테서 ‘신의 손’이라 불리는 사람의 연락처를 받아냈으니 연락만 닿는다면 오히려 치료 가능성이 더 컸다.
아빠의 시큰둥한 태도에 녀석은 발끈하며 말했다.
“그게 뭐예요!”
아빠를 위해 예쁜 이모를 설득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
이게 다 미적거린 아빠 탓인데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은 모습이라니.
화가 난 박은성은 상대하기 싫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짧은 다리로 씩씩거리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갑자기 토라진 아들을 보자 박태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뜬금없이 화는 왜 내는 거야?”
박은성이 입을 삐죽거렸다.
“아빠는 내 말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예쁜 이모가 실력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거죠?”
박태진은 뾰로통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묵묵부답했지만 표정에서 이미 드러났다.
녀석이 발끈했다.
“진짜라니까요? 제가 알아봤는데 엄청 대단한 분이라고 했어요. 방금 아무도 불가능한 고난도 수술을 마치고 나왔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박태진은 여전히 무관심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들을 달래주는 척했다.
“널 의심한 적 없어. 다만 아빠의 상황은 아빠가 제일 잘 알아. 이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라서 네가 찾은 명의도 해결하기 어려울지 몰라.”
그나저나 아들이 낯선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 박태진은 더욱 의아했다.
지금까지 새엄마가 되어주겠다고 찾아온 명문가 딸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하지만 녀석은 질색했고 예외는 없었다.
심지어 박씨 가문과 돈독한 사이인 허지유마저 곁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했다.
어느덧 그의 ‘악명’은 세온시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아들이 여자에게 호감을 가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라서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이런 수단으로 녀석에게 접근한 거라면...
아들이 단념하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이내 한마디 보탰다.
“아빠가 진짜 명의를 찾아냈거든? 오늘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그만 삐지고 집에 가자.”
박은성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빠가 얘기한 명의가 예쁜 이모랑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마주칠 일이 없을 텐데...
비록 처음 만난 사이지만 왠지 모르게 정이 갔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다니!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 예쁜 이모를 찾아내자.’
치료는 물 건너갔으니 새엄마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않은가?
녀석은 곧바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속상하던 마음도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허소원은 병원을 떠난 이후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착잡한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지 6년이 지나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아이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얼핏 보면 딸과 비슷한 나이대처럼 느껴졌다.
다시 말해서 이혼하자마자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았다는 뜻이었다.
‘설마 허지유랑?’
허소원은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시 결혼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누누이 얘기했는데 박태진은 자녀 계획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관계를 하고도 피임약을 먹게 했다.
하지만 박씨 가문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결혼하고 나서 임신이 안 된다는 이유로 송연희의 갖은 압박과 경멸을 견뎌내야 했다.
물론 박태진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이혼하자마자 아이를 가지다니?
누가 봐도 뻔하지 않은가?
아이를 갖기 싫은 게 아니라 단지 그녀가 낳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과거를 떠올리는 순간 허소원은 욕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역시 개자식이었어.’
한창 투덜거리는 와중에 절친 심가을이 연락이 왔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가을아, 왜?”
휴대폰 너머로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원아, 일 끝났어?”
허소원이 대답했다.
“응. 이제 집에 가려고.”
심가을이 즉시 끼어들었다.
“가긴 어딜 가. 간만에 세온시에 왔는데 얼굴이라도 보자. 게다가 오늘 수술이 엄청 오래 걸렸다며? 몸보신도 해야지.”
그녀의 말에 허소원이 피식 웃었다.
“그래, 밥 한 끼 얻어먹지, 뭐. 주소 보내주면 찾아갈게.”
“응! 비스트로 루나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허소원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한테 말했다.
“아저씨, 저녁은 밖에서 먹을게요. 비스트로 루나로 가주세요.”
“네, 아가씨.”
임정만이 대답하고 핸들을 돌렸다.
30분 후, 허소원은 레스토랑에서 심가을과 만났다.
몇 달 만에 만나는지라 그녀를 보자마자 심가을은 잽싸게 뛰어가 덥석 끌어안았다.
“소원아, 드디어 왔구나!”
이내 불량배처럼 그녀의 턱을 살짝 붙잡고 농담을 건넸다.
“더 예뻐졌네? 하늘도 참 무심하지. 미모는 물론 재능까지 주다니, 부러워서 질투 날 정도야.”
허소원은 정색하며 받아쳤다.
“우선 외모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거고, 재능은 타고나야 하지.”
심가을이 키득거렸다.
“잘난 척은!”
허소원도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