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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진이서는 변호사에게 연락했 절차를 마치려면 한 달 정도가 필요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알겠어요.” 덤덤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는데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준서가 강예슬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다. 이준서는 거실에 서 있는 진이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마침 잘됐네. 15분 줄 테니까 안방에 있는 짐들 다 빼. 예슬이 이번에 많이 놀라서 좋은 환경에서 몸조리해야 해. 그 방이 빛도 통풍도 잘되니까 양보하라고.” 예쁜 드레스를 입은 강예슬은 이준서 뒤에 서서 부드럽지만 묘하게 우쭐대는 말투로 말했다. “준서야. 내가 민폐 끼친 거 아니야?” 이준서는 진이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눈동자에 오로지 강예슬만 담은 채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진이서는 할아버지가 나를 보살피기 위해 찾아준 도우미일 뿐이야.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여기 살 자격조차 없어.” 진이서는 매몰찬 이준서의 말에 마음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 하여 대답도 눈길도 주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강예슬이 뒤따라오며 도와주는 척했다. “이서 씨. 도와줄게요.” 진이서가 거절하려고 고개를 드는데 강예슬의 손에 낡지만 상태가 좋은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거기에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겨준 유품이 들어 있었다. “건드리지 마요.” 진이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예슬이 그 소리에 놀라 손을 파르르 떨자 은색 비녀가 바닥에 떨어지며 매화꽃이 찌그러졌다. 진이서는 눈빛이 요동치더니 한걸음에 달려가 강예슬을 밀쳐내고 비녀를 주워 들며 부들부들 떨었다. “누가 내 물건에 손대래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강예슬은 눈시울을 붉히며 억울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선 이준서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준서가 성큼 달려와 있는 힘껏 진이서를 밀쳐냈고 진이서는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진이서. 미쳤어?” 이준서의 눈빛은 원수라도 보듯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깟 게 뭐라고 사람에게 손을 대?” “할머니 유품이야.” 진이서가 비녀를 꼭 쥐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이준서를 노려봤다. “유품이면 뭐? 그래봤자 물건인데 깨지면 말지.” 언짢은 이준서의 목소리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밀친 게 용서되는 건 아니야. 당장 예슬에게 사과해.” 진이서는 너무 황당해서 눈물을 글썽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 “그래서 사과 못 하겠다는 거야?” 이준서가 매서운 눈빛으로 언성을 높였다. “진이서 밖으로 끌어내서 꿇려.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절대 일어나지 못하게 해.” 보디가드 두 명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아무 표정 없이 진이서를 일으켜 세웠다. 늦가을의 정원은 바닥이 차갑고 딱딱했다. 강제로 조약돌이 깔린 바닥에 꿇어앉은 진이서는 무릎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이를 꽉 악문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온이 점점 떨어지더니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물이 머리와 옷을 흠뻑 적시자 한기가 뼈를 파고들었다. 무릎은 이미 통증으로 마비되었고 너무 추워 몸이 파들파들 떨리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도 진이서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꿇었을까, 의식이 희미해지며 눈앞이 깜깜해진 진이서는 그대로 차가운 빗속에 쓰러졌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축축한 정원에 널브러져 있었고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너무 아팠다. 현관에 선 이준서는 오만하게 진이서를 내려다봤다. 처참한 진이서를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예슬이 착해서 이번 한 번은 봐주겠대. 진이서. 쓸데없는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진이서가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너무 허약한 나머지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는 청춘을 다 바쳐 사랑한 남자를 봐도 실망 외에 다른 느낌이 들지 않아 눈꺼풀을 축 늘어트린 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진이서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벽에 걸린 커다란 결혼사진을 올려다봤다. 사진 속, 이준서는 늘 그랬듯 아무 표정 없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을 짓고 있었다. ‘참 우습지.’ 두 사람의 결혼은 결혼식도 축복도 없이 이성범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찍은 결혼사진만 있었다. 사진을 찍을 때도 이준서는 매우 비협조적이라 사진작가가 보정해서야 겨우 봐줄 만한 사진이 나왔다. 지금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진이서는 너무 황당했다. 하여 도구를 찾아내 힘겹게 사진을 내리고는 가위로 이어 붙일 수조차 없게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어차피 곧 떠날 텐데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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