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시간이 흘러 드디어 이혼 절차가 끝났고 진이서는 법원에서 이혼 서류를 들고나왔다. 이로써 이준서와의 결혼 생활이 막을 내렸지만 진이서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했다.
별장으로 돌아온 진이서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있다면 이곳에서 산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으로 된 물건이 가련할 정도로 적다는 것이다.
옷장에는 죄다 이준서를 보살피면서 입던 깔끔하고 점잖은 옷들뿐이었고 화장대에는 화장품보다 가정상비약과 이준서의 기호와 주의 사항을 적은 포스트잇, 그리고 발병 시 사용하는 특수 도구들이 더 많았다.
짐이라고 해봤자 이준서의 생활을 둘러싼 흔적들뿐이었다. 물건을 하나둘 정리하는데 추억이 파도처럼 진이서를 덮쳤다.
처음 왔을 때 이준서가 강한 거부감을 보이다가 처음으로 곁을 내줬을 때 느꼈던 희열, 상태가 좋아졌다가 악화하길 반복할 때면 죄어오던 가슴, 그리고 강예슬이 나타난 뒤로 더 빈번해진 무시와 냉대까지...
결국 진이서는 약손가락에서 상대는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는 결혼반지를 뺐다. 차가운 촉감이 5년간 이어온 결혼 생활의 온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혼 증명서, 약혼반지, 그리고 주의 사항이 빼곡히 적힌 포스트잇까지... 진이서는 이준서에 관한 모든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상자에 담아 서재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가지고 온 상자를 테이블 한쪽에 놓는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오래? 서재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당장 나가.”
진이서가 몸을 돌려보니 이준서가 언제 들어왔는지 문 앞에 서서 음침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물건 좀 놓으려고 온 거야. 이제 나갈게...”
진이서가 해명했다.
“그게 뭐든 네 손이 닿은 거면 더러워.”
이준서는 들으려 하지 않고 역겹다는 표정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나가. 앞으로 다시는 들어올 생각하지 마. 들었어?”
진이서는 흥분한 이준서를 보고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
“미안해.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야.”
진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여기에 들어와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진이서가 그대로 몸을 돌려 조용히 서재에서 나오는데 도우미가 허겁지겁 달려와 말했다.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강예슬 씨가 정원에서 넘어졌는데 발을 삐끗했는지 몹시 아파합니다.”
순간 얼굴이 굳어진 이준서는 진이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도우미에게 흘리듯 이렇게 말했다.
“서재 제대로 소독해요.”
그러더니 성큼성큼 정원으로 달려갔다.
진이서는 이준서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른 여자를 향해 달려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준서는 그대로 강예슬을 안고 차에 올라타더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진이서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아까 정리한 작은 캐리어를 들고 십 년 넘게 살아왔지만 한 번도 속한 적이 없는 이곳을 돌아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창밖은 햇살이 눈 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