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늦은 밤. 정가현은 거대한 무언가에 눌린 듯 숨이 막혀 도무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서서히 정신이 든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떴고, 어렴풋한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서준 씨? 서준 씨야?”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응’이라고 대답하더니 술기운에 여자에게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그제야 여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결혼한 지 3년, 변서준과의 첫 스킨십이다. 그녀는 어르신이 억지로 붙여준 아내라 변서준은 여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여 오늘 어떤 이유로 그녀의 방에 들어왔든지 막론하고 그녀는 마냥 기뻤다. 그 일을 끝낸 뒤, 변서준은 여자의 몸에 편하게 기대있었는데 창밖의 달빛이 그의 완벽한 몸매를 은은히 비춰주고 있었다. 빠르게 뛰는 남자의 심장 소리를 들으니 여자는 마치 이 순간이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길 바라고 바랐다. 정가현은 변서준을 품에 안고 간절하게 말했다. “서준 씨, 나 정말 서준 씨 너무......” ‘사랑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변서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영아......” 순간, 정가현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지영, 모지영. 어르신 때문에 몇 년 동안 쭉 해외에서 생활했던 변서준의 첫사랑이다. 그런데 어제, 모지영이 귀국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도발적인 문자를 보냈다. “정가현, 나 컴백했어. 변씨 가문에 더는 네 자리는 없을 거야!” “나 서준이랑 죽마고우야. 그런데 어떻게 네가 날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네가 살던 시설로 꺼져.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거기야.” “서준이가 나 얼마나 사랑하는지 넌 모르지? 설령 네 침대에 누워있어도 아마 내 이름 부를 걸? 그러니 넌 고작해야 대체품이라는 거야. 정가현, 어때? 기분 더럽지?” 대체품? 그녀는 어르신이 점 찍은 손주며느리이자 당당한 변씨 가문 사모님 정가현이지 절대로 누군가의 대체품이 아니다! 귓가에선 아직도 변서준이 모지영의 이름을 속삭이고 있었다...... 모지영의 도발적인 문자는 그녀의 비참하게 만들었다. 온몸이 떨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와 정가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3년을 조심스럽고 고분고분하게 살아왔다. 심지어 남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직장까지 포기한 채 전업주부가 되었다. 허영심으로 가득 찬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늘 그녀의 출신이 불분명하다고 그녀를 무시하고 괴롭혔지만 변서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모든 걸 혼자 묵묵히 견뎌냈다. 이 빌어먹을 남자의 눈길을 얻으려고, 그녀는 여태 비굴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왜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이렇게 잔인하게 짓밟으려고 하는 걸까? 밤은 유난히 길었다. 그리고 정가현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다음 날 아침, 쏟아지는 햇살에 변서준은 잠에서 깼다. 미간을 문지르며 눈을 떠보니 화장대 앞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는 정가현이 보였다. 문뜩 어젯밤의 황당한 일이 떠올라 남자는 뭔가 깨닫기라도 한 듯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기운을 풍겼다. 정가현은 비록 남자를 등지고 있었지만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일 없듯이 얼굴에 스킨로션을 계속 바르고 있던 그때, 변서준이 갑자기 그녀의손목을 낚아채 위로 잡아당겼다. 손에 들렸던 스킨로션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더니 순백의 크림은 사방으로 튀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드는 순간, 변서준의 사납고 혐오스럽다는 시선을 마주하며 여자는 여전히 심장이 떨렸다. “비겁하게 나한테 약을 먹였어? 이렇게 날 가지면 진짜 이 집안의 안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변서준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높은 곳에서 여자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팔목을 더 세게 잡았다. 준수한 얼굴에 그런 표정은 정말 섬뜩하리만큼 공포스러웠다. 약을 먹여? 정가현은 싸늘하게 웃으며 되받아쳤다. “당신 눈에, 내가 고작 그런 여자였어?” 변서준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혐오감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거들먹거렸다. “네가 수단이 없었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너한테 넘어갔겠어? 그러니까 나한테 무조건 너와 결혼하라고 하신 거지. 이제 와서 왜 순진한 척이야? 너처럼 뼛속부터 천박한 여자는 지영이 발가락 하나에도 못 미쳐!” 뼛속부터 천박한 여자, 순진한 척...... 아, 이 남자 마음속에 난 이런 이미지였구나. 약을 먹여서 남자를 가지고 싶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변서준, 그녀에 대해 정말 하나도 아는게 없었다. 3년의 기다림과 최선이 우스워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더는 버틸 필요도 없다. 정가현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손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당당하게 머리를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변서준 씨, 우리 이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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