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다시 시작

왼쪽 다리에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는 모습이었다. 당황한 서민영은 버둥거리며 다리를 숨기려 했지만 소은정은 결국 그 붕대를 풀어냈다. 순간, 병실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살짝 긁힌 듯 보이는 작은 상처를 보며 소은정은 코웃음을 쳤다. “많이 다쳤네? 내가 좀 더 늦게 왔으면 어쩔뻔했어? 상처가 보이지도 않았겠어” “은정 씨... 수혁아, 그런 거 아니야. 나 몸이 약하잖아. 수혈을 받으면 더 빨리 낫는다고 해서...” 박수혁의 시선을 의식한 서민영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한 달에 큰 부상을 네 번이나 당해? 그냥 내 피를 다 뽑아가겠다고 말해.” 소은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앞으로 그럴 기회도 없겠지만. 박수혁이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연기는 그때 다시 시작해.” 말을 마친 소은정은 단호하게 병실 문을 나섰다. 하지만 방금 전, 당당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은 듯한 느낌에 몸도 마음도 고통스러웠다. 북받치는 서러움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은정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오빠...” 소은정의 목소리에 수화기 저편에 있는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야? 데리러 갈게.” 몇 분 뒤,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병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남자는 어느새 정신을 잃고 쓰러진 소은정을 안고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 한편, 박수혁은 주치의 멱살을 잡은 채 밖으로 끌고 나오더니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뭐? 다리 부상이 심각해? 겨우 저 정도로 수혈을 해? 대학병원 수준이 겨우 이 정도야?” 말투에 담긴 분노와 한기에 의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수혈에 점점 창백해져 가던 소은정의 얼굴이 떠오르며 박수혁의 마음속에도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박수혁의 포스에 겁을 먹은 의사는 결국 모든 걸 실토했다. “민영 아가씨가 분부하신 일입니다. 저희 병원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민영 아가씨가 대표님도 아는 일이라고 하셨고 수혈을 받을 때도 항상 곁에 계셨으니 동의하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서민영, 그가 그녀를 너무 오냐오냐했던 걸까? 그 사진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를 오해하고 이혼을 요구한 걸까? 정말 그런 거라면 다시 해명하면 그만이었다. 사랑 없는 결혼이었지만 가정이 파괴되는 걸 원치 않았다. 아니, 그냥 이렇게 평생 살아도 괜찮다 싶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만약 소은정이 두 사람의 사이가 불만이라면 앞으로 거리를 두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오해만 잘 풀면 계속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박수혁은 휴대폰을 들어 소은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이 꺼졌다는 알림음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박수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경호원들을 불러 소은정의 행방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몇 분 뒤, 경호원들은 우물쭈물하며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대표님, 10분 전, 병원 CCTV가 해커의 공격을 받아 시스템 전체가 다운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모님도 마침 그때 사라지셨고요. 병원을 다 뒤져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병원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경호원들의 보고에 박수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혼 서류에 망설임 없이 사인하던 모습이 떠오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또 피어올랐다. 까만 눈동자가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돈 한 푼 없는 신세에 어디로 간 걸까? 정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걸까? 집요하게 맴돌던 짜증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더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으라고.” 감히 휴대폰을 끄고 잠수를 타? “네.” 이제 더 이상 그의 아내도 아닌 사람 때문에 마음이 이토록 불안하다는 걸 박수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이탈리아 스타일의 화려한 인테리어, 익숙한 한정판 가구들, 눈을 뜬 순간, 너무나 익숙한 풍경들이 소은정의 시야에 들어오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울어? 요즘 세상에 이혼이 흠도 아니고. 아빠가 너 하나 못 먹여살릴까 봐?” 단호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소은정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확인한 소은정은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가 기침 한 번만 해도 서산 사람들 전체가 두려움을 떤다는 무시무시한 존재, 전설적인 기업 SC 그룹의 회장, 소찬식이 꼿꼿한 모습으로 소은정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중년이 다 지난 나이임에도 포스와 위엄은 전혀 손색이 없었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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