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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방과 침대 건너편을 다시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최상급 연하남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온나연은 한참이나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연하남의 잘생긴 얼굴 말고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털고 두세 번 만에 옷을 주워 입고 호텔을 나왔다. 호텔 밖은 햇빛이 따가웠다. 손목시계를 들어 보니 딱 아홉 시, 막 바빠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마침 주말이기도 하고, 실험실에 새로 들어온 몇 구의 시신도 이미 모두 부검 보고서를 내놨다. 이제 이틀은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온나연은 차를 잡아탔다. 원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가는 길에 마음을 바꿨다. “기사님, 정흥 프린트에 잠깐 들러 주세요.” 볼일을 모두 끝내고 다시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오전 11시였다. 멀리서 그녀를 본 도우미 주미연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사모님, 드디어 오셨네요. 도련님이 아침 내내 기다렸어요!” “여경민이 집에 있어요? 게다가 저를 기다려요?” 온나연은 황당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 “하, 해가 서쪽에서 떴네요.” 법적으로 남편이라는 그 사람이 바깥에서 놀기 시작한 뒤로, 열흘 보름 얼굴을 못 보는 건 예사였다. 가끔 집에 들러도 허미경에게 떠밀려 밥 한 끼 하고는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여경민과 마주친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이 양반은 정말 집을 여관처럼 살고, 여관을 집처럼 살았다. 거실에서는 맑고 유려한 피아노 소리가 흘렀다. 움직이는 성의 선율이었다. 그 음을 듣는 순간 온나연의 발이 문턱에서 굳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고 눈가가 저절로 뜨거워졌다. 거실의 거대한 통유리창 곁. 여경민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우아한 자세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길고 유연한 손가락이 흑백 건반 위를 능숙하게 미끄러졌다. 아름다운 선율이 요정처럼 찬란한 햇빛에 엉켜 끝내 그의 머리칼과 이목구비 위에 사르르 쏟아졌다. 그 찰나 온나연은 그의 완벽한 얼굴에서 10년 전의 소년을 보았다. 오후의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던 온몸이 반짝이던 그 소년을 말이다. 10년 전, 온나연은 그렇게 여경민을 사랑하게 됐다. 거의 첫눈에 말이다. 10년이 지나도 사람은 그대로였다. 다만 그를 사랑하던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여희수는 선율을 따라 춤을 추다가 문가에 선 온나연을 발견했다. 흑진주 같은 큰 눈이 반짝이며 달려와 그녀의 다리를 와락 안았다. “엄마, 돌아오셨어요. 저랑 아빠가 엄마를 오래 기다렸어요.” 온나연은 고개를 숙여 말랑말랑한 아이를 내려다봤다. 어제만 해도 ‘수민 이모’ 타령으로 속을 뒤흔들던 그 배은망덕한 아이가 지금은 달콤한 몇 마디를 툭툭 건네니 가슴속에 꽉 막혀 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이야? 우리 희수 왜 이렇게 착해?” 그녀는 참지 못하고 통통 말캉한 볼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어젯밤 아이가 그녀의 손이 시체를 만져서 더럽다고 했던 말이 번쩍 떠올라 무의식중에 손을 거두었다. 대신 아이의 어깨만 살짝 잡고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희수, 엄마 보고 싶었어?” “네네, 희수는 엄마 보고 싶었어요.”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조그맣고 예쁜 턱을 치켜들며 호기심 가득 물었다. “엄마, 어젯밤에는 어디 갔어요? 아빠가 식당 방에 갇혀서 엄청 엄청 화를 냈어요. 희수 진짜 무서웠어요!” “어, 그게...” 온나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피아노를 치는 여경민을 슬쩍 흘겨봤다. 그때 선율이 멈췄다. 여경민이 고개를 돌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폭풍이 몰아칠 듯한 기세였다. 온나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허리를 폈다. 더는 그리 주눅 들지 않았다. 이 인간이 매일 얼마나 많은 여자 사이를 떠도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런 남편을 둔 아내가 가끔 한 번쯤 몸가짐 단단히 하라고 만들어두는 일이 그리 과한가? “마침 집에 있으니 이제 얘기해요.” 이전처럼 화목한 겉멋을 위해 일부러 부드럽게 비위를 맞추지도 않았다. 태도는 비정하게 차가웠다. 마치 그녀의 고객을 대하듯, 그러니까 부검실에 누운 한 구 한 구의 시신을 대하듯 말이다. “좋아. 감히 다시 내 집에 들어오다니, 너를 과소평가했네.” 여경민이 일어섰다. 곧고 우월한 실루엣이 건반 위로 완벽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늘하고, 거리감 있고, 약간의 위험이 깃들어 있었다. 분명히 어젯밤의 그 우스꽝스러운 소동이 그의 속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여씨 가문에 붙어 앉아 그녀를 붙잡아 호통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그녀가 밤새 안 들어왔다.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여희수가 아니었으면 방금 피아노를 통째로 걷어찼을지도 몰랐다. 온나연은 자포자기하듯 담담했다. 그를 위아래로 훑고는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팔, 다리 멀쩡하네요. 근데 그 물건이 머리를 지배하면 바지춤은 왜 못 단속하죠?” “온나연!!” 여경민은 이를 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온나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볍게 말했다. “가요. 위층으로. 우리 일, 이제 매듭지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보다 먼저 2층 침실로 곧장 올라갔다. 여경민은 그녀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고 표정은 복잡했다. 무엇인가를 예감한 듯했다. “아빠, 엄마랑 싸워요?” 여희수가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겁먹은 목소리였다. “방금 엄마 너무 무서웠어요. 희수가 아는 엄마가 아니에요. 수민 이모가 더 다정해요. 수민 이모가 희수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경민의 미간은 더 깊어졌다. 그는 아이의 말랑한 볼을 살짝 집으며 낮고 차갑게 말했다. “아무 말이나 하지 마.” 부녀가 모르는 사이, 온나연은 사실 계단 코너에서 잠깐 멈춰 서 있었다. 여희수의 말이 전부 귀에 들어왔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마음을 더 굳혔다. 여경민이 아래층에서 뭘 그리 꾸물거렸는지, 십여 분이 지나서야 침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역시나 차갑게 걸어왔다. “너...” 그가 말을 떼려는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온나연이 먼저 가방을 열어 서류 뭉치를 꺼내 건넸다. “이혼 합의서예요. 방금 출력해서 아직 따끈해요. 문제없으면 말미에 서명해요.” 말투에는 표정 하나 없었다. 마치 업무적으로 계약서에 도장 찍듯 말이다. 여경민은 합의서를 받아 들었다. 원래도 차갑던 얼굴이 얼음장처럼 더 차가워졌다. 불쾌한 표정으로 넘기다가 한 군데를 가리켰다. “여기 문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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