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임수아의 말에 성혜란은 목이 메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임수아가 임정민에게 또 고자질할까 봐 참아야 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임정민은 분명 윤시혁에게 부탁할 게 있을 거라는 걸.
그러니까 지금은 임수아를 건드리면 안 됐다.
성혜란은 이를 악물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짜내듯 말했다.
“그래! 일이 있다면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네.”
임수아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오늘 밤에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억지로 사과하면 내가 기뻐서 달려갈 거라고 생각하나?’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윤시혁과 함께 식사하러 오라고 한 건 분명 윤시혁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일 거라는 걸.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급히 성혜란에게 사과하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임수아의 마음속에 슬픔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작은 발코니를 나와 한효진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을 열자마자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윤시혁이 한효진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임수아를 본 그의 미간이 살짝 떨렸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2초 만에 시선을 돌렸다.
임수아는 문을 닫고 소리 없이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둘은 침묵 속에서 한효진을 지켰다. 한 마디의 대화도 없었다.
한효진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이 따뜻한 광경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이 이혼 직전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다시 아려왔다.
“할머니, 깨어나셨네요.”
윤시혁의 목소리에 임수아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할머니.”
“시혁아, 수아야.”
한효진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두 손을 내밀었다.
윤시혁과 임수아는 각각 한 손씩을 잡았다.
“할머니, 하실 말씀 있으신 거예요?”
임수아가 물었다.
“오늘부터 너희 둘은 본가로 돌아와 살아라.”
한효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약했다.
이 말에 임수아와 윤시혁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본가로 돌아오라니?’
한효진은 두 사람의 반응을 눈여겨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겪고 보니 내가 이 나이에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 모르겠구나. 그러니 너희들이 이 할미를 좀 많이 보살펴 주면 좋겠어. 내가 아직 건강할 때 너희들 아기도 봐줄 수 있고.”
임수아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아기?’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녀와 윤시혁은 결혼 후 단 한 번도 부부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 키스조차 하지 않았다.
“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할머니는 분명 장수하실 거예요.”
임수아는 진지하게 말했다.
한효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안 할게. 그럼 너희들도 할머니 말 들어줄 거지? 본가로 돌아와 살자, 응?”
임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재 그녀와 윤시혁의 관계로는 본가에서 함께 사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윤시혁이 갑자기 대답했다.
임수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임수아는 이해했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한효진을 향해 웃었다.
“네, 할머니. 저희 본가로 돌아올게요.”
한효진의 건강을 위해 이혼을 보류한 이상, 한효진이 최우선이었다.
“그래, 그래.”
한효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후에 윤시혁과 임수아는 세렌빌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윤시혁과 같은 지붕 아래 살게 될 생각에 임수아의 마음은 복잡했다.
저녁에 그녀는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에서 홈웨어를 꺼내 입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윤시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임수아의 새하얀 피부였다.
하지만 그 매끈한 피부에는 곳곳에 찰과상이 가득했다.
윤시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다 차에서 뛰어내려서 생긴 상처인가?’
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시선이 임수아의 허리 뒤쪽에 있는 흉터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허리까지 길게 뻗은 흉터였다.
뒤에서 소리가 나자 임수아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옷을 내렸다.
윤시혁을 본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허리 뒤의 흉터는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심경에서인지 윤시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임수아의 얼굴은 더욱 굳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당시의 충격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불길 속에서 어린 임수아는 피범벅이 된 소년을 끌어내려고 필사적이었다.
“정신 차려! 자지 마, 버텨!”
“빨리, 도망쳐...”
소년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떨어진 나무토막이 임수아의 허리를 강타했다.
“아!”
임수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윤시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과 몸을 닦았다.
의사는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었다.
몸을 정리한 후, 임수아는 방으로 나와 소파에 베개와 이불을 준비했다.
이혼을 결심한 사이에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부적절했다.
이 광경을 본 윤시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는 임수아의 행동이 만족스러웠다.
그 역시 아무 거리낌 없이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임수아는 윤시혁의 차에 앉아 임씨 가문으로 향했다.
점심때, 임정민이 다시 전화를 걸어 저녁에 오라고 했는데 마침 한효진이 옆에서 듣고는 윤시혁에게 같이 가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임씨 가문에 도착하자 임정민과 성혜란은 윤시혁을 보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가정부들은 서둘러 최고급 차를 내왔다.
임수아가 앉자마자 성혜란이 말했다.
“수아야, 같이 올라가자. 할 말이 있어.”
임수아는 그녀가 윤시혁과 임정민만의 대화 공간을 만들려는 것임을 알았다.
침묵하던 그녀는 성혜란을 따라 2층의 작은 발코니로 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성혜란의 얼굴이 변했다.
“임수아! 너 이젠 막 나가는구나! 아버지께 고자질하는 법도 배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