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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골프 카트에 다시 시동을 건 후 심민지는 계속하여 주변 풍경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때 성지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 그 말에 심민지는 설명하려던 단어들이 목구멍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는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외딴 곳에 숨어들어도 결국 빚쟁이들에게 발각되곤 했다. 지난 몇 년간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그냥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곳이 예뻐서 눌러앉게 됐어요.” 마침 이 도시에 심민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거리가 멀어 범죄기록증명을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고 둘러댈 수 있었다. 심민지의 전문적인 설명을 들은 성지태는 그녀가 이 일을 꽤 오래 해왔음을 알아챘다. 그가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개과천선은 했구나. 축하해. 역시 인간은 고생을 좀 해야 정신 차리고 착실하게 산다니까?” 심민지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은 바람에 관성으로 앞으로 밀린 성지태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는 사과하기는커녕 되레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다. ‘잘못을 한 적이 없는데 개과천선은 무슨. 너만 아니었어도 그런 전과 기록이 생겼을 리도 없었어. 고생을 좀 해야 한다고? 지난 몇 년간 겪은 처절한 몸부림이 너한테는 조그마한 고생에 불과하단 말이야?’ 심민지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성지태에게 욕하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라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권력 있는 자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자본이 없었다. 성지태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그녀의 인생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열대 기후라 갑자기 비가 내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래도 비 덕에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대표님, 비 내리는데 계속 둘러보실 건가요, 아니면 돌아가실 건가요?” “계속 둘러봐야지.” 심민지는 다시 골프 카트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다음 관광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가 점점 더 세게 쏟아졌다. 성지태처럼 돈이 많은 사람은 입는 옷도 죄다 고가라 비에 젖으면 다 망가질 것이다. 이젠 다음 관광지는 고사하고 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대표님, 앞에 접견실이 있는데 잠시 거기서 비를 피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 차가 멈춰선 후 심민지는 성지태를 돌아보며 말했다. “차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러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민지가 우산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심민지를 보던 성지태는 그녀에게서 과거 학생 시절의 그림자를 찾아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예전의 심민지라면 남을 시중드는 일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한번 비가 내렸을 때 심민지는 성지태에게 겉옷을 벗으라고 요구하더니 그 겉옷을 걸친 채 빗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흠뻑 젖은 성지태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었다. 비록 그때 심민지가 목적을 가지고 성지태에게 접근했을지라도 스스로 가치가 높다고 여기는 여자였기에 그를 쫓아다닌다고 해서 비굴해지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런데 4년 만에 마주한 그녀는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보는 이가 다 역겨울 지경이었다. 심민지는 성지태가 꿈쩍도 하지 않자 한마디 귀띔했다. “대표님, 제가 우산 씌워드릴 테니까 내리세요.” 성지태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심민지는 우산의 대부분을 그의 머리 위로 씌우고 정작 본인은 비를 홀딱 맞았다.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성지태는 그녀를 우산 밑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심민지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가 무의식적으로 성지태를 밀어냈다. 그러자 성지태가 짜증 섞인 얼굴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움직이지 마. 비 많이 오잖아.” 갑작스러운 밀착에 성지태에게서 나는 특유의 바닐라 향이 섞인 우드 향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대학 시절 성지태는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운동을 좋아해서 늘 옅은 땀 냄새가 났는데 그 땀 냄새마저도 역겹지 않고 청춘의 싱그러움으로 가득했었다. 힘든 첫사랑이었지만 심민지의 청춘 대부분을 차지한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 그의 몸에서 나는 이 값비싼 향수는 뼛속 깊이 새겨진 계급 차이가 무엇인지 그녀에게 상기시켜주었다. 접견실에 들어가자마자 심민지는 바로 화장실로 가서 수건을 가져와 성지태의 젖은 옷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자기 몸을 닦을 겨를도 없이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 몸을 닦으면서 심민지의 젖어버린 하얀색 오피스룩을 내려다보던 성지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문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속이 은근히 비치는 그녀의 몸매를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성지태는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여자를 혐오했지만 심민지의 몸매가 참으로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살결이 살짝만 드러나도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심민지는 성지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고는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수건으로 몸을 감쌌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성지태는 흥미를 잃은 듯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살 빠졌네? 예전처럼 글래머하지 않아.” 심민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도 그와 뜨거웠던 장면들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는 심민지는 이성을 잃고 들고 있던 수건을 성지태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뜻밖에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그녀가 씩씩거리는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봤다. “너 원래 길들지 않은 고양이잖아. 어디서 얌전한 척이야?” 성지태의 말에 심민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년 동안 마음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그의 눈에 그녀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쉬운 여자였다. 심민지는 다시 프로다운 태도를 보이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대표님, 먼저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세요. 그 사이 제가 차를 가져올게요.” 그러고는 우산을 쓰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성지태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수건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잠시 후 심민지가 관광지 안에 있는 승용차를 몰고 왔다. 차에서 내린 후에는 더 큰 우산을 펼쳤다. 성지태는 그녀가 그와 우산을 같이 쓸 것이라 예상했지만 심민지는 혼자 다른 우산을 쓰고 빠르게 차 뒷좌석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녀가 일부러 그와 거리를 두려 한다는 걸 성지태는 알아챘다. ‘내가 뭐 죽이기라도 한대?’ 성지태는 심민지의 우산을 빤히 쳐다보다가 심민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자신의 우산을 바닥에 던진 다음 심민지의 우산 밑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의 두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지더니 뒷걸음을 치면서 바닥을 내려다봤다. 빗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집어삼킬 듯했다. “대표님, 비가 많이 오니 어서 차에 타세요.” 성지태는 커다란 손으로 심민지의 목덜미를 잡아 강제로 그를 올려다보게 했다. “심민지, 너 지금 꼭 가짜 인간 같아.” ‘가짜 인간?’ 만약 지난 4년 동안 살던 대로 살았더라면 그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가짜 인간이 같다고 했으니 끝까지 가짜로 살면 되지, 뭐.’ 심민지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계속 차에 타지 않으시면 차 내부가 다 젖을 겁니다.” 성지태는 마지못해 차에 올랐다. 심민지도 어느새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차 안의 에어컨 바람을 맞은 순간 심민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감기에 걸린 탓인지 26도로 설정했는데도 추웠다. 심민지는 백미러로 성지태를 힐끗 쳐다봤다. “대표님, 계속 관광하시겠어요, 아니면 방으로 돌아가시겠어요?” “계속 관광할 거야.” 그녀는 일 자체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으나 다만 지금 너무 추웠다. 하지만 이 에어컨 온도는 호텔에서 설정해둔 정상적인 온도라 함부로 바꿀 수도 없었다. 게다가 성지태가 더위를 잘 타는 편이라 추위를 참으며 성지태에게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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