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강태리는 침실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옷장 절반이 비었고 침대 위에는 여행 가방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동작은 날렵했고 눈빛은 단호했다. 여행 가방으로 들어가는 물건 하나하나가 마치 이 집과의 마지막 연결을 끊어내는 듯했다.
그때 침실문이 황급히 열리며 육지헌이 큰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침대 위의 여행 가방을 본 순간 그는 멈칫했지만 눈에 흐른 당황의 빛이 곧 분노로 대체되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 녹음 파일은 대체 뭐야?”
그가 강태리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너 정말 민희를 망쳐놓고야 말겠어?”
강태리는 그의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무슨 녹음?”
“모른 척하지 마.”
육지헌이 휴대폰 화면을 그녀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녹음에서 소민희의 취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임형석 그 늙은이는 눈치도 없어. 그냥 알리바이 하나 좀 협조해달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파고들겠다며... 꼴 좋다 아주. 하필이면 그 사건을 건드려서 말이야...”
녹음은 거기서 끊겼고 댓글 창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모두가 그날의 재판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강태리가 육지헌의 손을 뿌리쳤다.
“너 말고 또 누가 했겠어?”
육지헌이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민희는 소씨 가문의 아가씨야. 어릴 때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어? 분명히 누군가가 일부러 함정을 판 거야.”
강태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육지헌 마음속에서 소민희는 항상 보호받아야 할 아가씨였다.
“그 녹음 파일을 누가 유포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강태리가 육지헌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난 그 사람이 고맙네. 세상 사람들에게 소민희의 진짜 얼굴을 보게 해줬으니까.”
“너.”
육지헌은 그녀의 말에 격분했다.
“민희는 지금 병원에서 응급치료 중인데 너 아직도 이런 말을 할 셈이야?”
강태리는 차갑게 웃었다.
“죄책감이 없다면 왜 자살을 시도했겠어? 이런 고육책은 너처럼 눈이 멀어진 사람만 속일 수 있을 뿐이야.”
육지헌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분노를 억눌렀다.
“좋아, 네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나도 더는 봐줄 수 없어. 지금 여론이 민희에게 불리하니까 네가 나서서 해명해 줘야 해.”
“무엇을 해명하라는 거야?”
“기자회견을 열고 그 녹음 파일이 네가 위조한 것이라고 인정해.”
육지헌의 말투는 단호했다.
“어머니 죽음으로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고 보복 심리로 녹음을 위조했다고 말하는 거야.”
강태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증거를 위조했다고 인정하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너는 알고 있어?”
“알아.”
육지헌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그래야 해.”
“무슨 근거로?”
“이걸로.”
육지헌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띄웠다. 임형석 교수의 유골이 안치된 곳이었다.
강태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엄마의 신장으로 나를 위협한 것도 모자라서... 이미 돌아가신 임 교수님의 안식까지 건드리려고 해? 육지헌, 넌 소민희를 위해서 양심까지 버릴 셈이야?”
육지헌은 강태리의 말을 무시하고 차갑게 말했다.
“임형석 교수님이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겠지? 네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네 선생님의 유골이 무사히 묘지에 남아 있을 거라 보장할 수 없어.”
“이 나쁜 자식아.”
강태리가 손을 들어 그에게 따귀를 날리려 했지만 육지헌은 단호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선택권은 너에게 있어.”
그가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임형석 교수님의 안식을 지킬 것인지,아니면 네 고집을 계속 부릴지 말이야.”
강태리의 손톱이 깊게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피가 손가락 사이로 스며 나왔다.
그녀는 한때 깊이 사랑했던 이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오직 낯설기만 했다.
한참 만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좋아.”
기자회견장에는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강태리가 굳은 얼굴로 준비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저의 정신 상태는 계속 불안정했습니다. 소민희 씨에 대한 원한으로 저는 그 녹음 파일을 위조했습니다...”
단상 아래에서는 즉시 술렁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강태리 씨, 범죄심리 전문가로서 증거를 위조하고 타인을 모함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돌아가신 스승님께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그때 갑자기 달걀이 날아와 그녀의 이마를 정확히 명중했다.
끈적한 달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이어서 더 많은 채소 잎과 생수병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살인자.”
“남을 모함하는 년.”
혼란 속에서 한 사람이 경비원을 뚫고 무대 위로 달려와 강태리의 뺨을 세게 때렸다.
“널 잘못 봤어.”
임형석 교수님의 딸 임윤서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너한테 그렇게 잘해 줬는데 넌 이렇게 아버지 명예를 더럽혀? 그 녹음 파일은 내가 간신히 찾아낸 증거였어. 그런데 네 손에 다 망가졌잖아.”
강태리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육지헌이 때맞춰 단상에 올라와 감정이 격해진 임윤서를 말렸고 동시에 양복 재킷을 벗어 강태리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는 휴지를 꺼내 그녀 얼굴에 묻은 달걀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수고했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보상해 줄게.”
강태리는 냉랭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너의 소원대로 소민희는 법의 제재를 피해 자유로워졌어. 이제 만족해? 육지헌, 우리 사이는 이제 끝이야.”
육지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넌 왜 계속 이러는 거야? 내가 널 보호하고 있잖아. 민희는 결백해. 지금 억울하게 욕먹는다 해도 나중에는 다 밝혀질 거야. 언젠가 진실이 드러나는 날이 올 거야. 내가 너에게 해명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인터넷에서 뭇매 맞는 건 너였을 거라고.”
“날 보호한다고?”
강태리는 웃었고 웃음에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육지헌, 넌 소민희에게 홀려 눈이 멀었고 앞뒤 분간도 못하더라. 설마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되길 바라는 건 아니지?”
강태리는 그 값비싼 양복 재킷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오늘 이후로 너와 나는 아무 상관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