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아파, 연승훈, 놓아줘!”
“내가 죽으면 너 후회할 거야?!”
“연승훈, 진슬기랑 가지 마. 나 너 사랑해...”
나는 잠에서 벌떡 깨어나 숨을 헐떡였다. 갓 육지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오고, 목은 찢어질 듯 아팠다.
간신히 눈을 뜨니 머리 위에는 눈부신 조명, 옆에는 기계가 삑삑 울리고 있었다.
“대표님, 사모님이 깼어요. 의사는 머리를 부딪히고 흥분해서 실신했을 뿐이라고 했어요. 다른 문제는 없대요.”
누군가 침대 곁에서 낮은 목소리로 통화하고 있었다.
여기가 병실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럼 내가 아픈 건가?
휴대폰 너머로 차갑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없으면 됐어. 나는 곧 온라인 회의가 있어서 못 가.”
전화를 하던 사람이 한숨을 쉬고 몸을 돌리다가,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사모님, 깨어나셨어요?”
나는 막 입을 떼어 물으려 했다. 그러자 정장 차림의 여자가 먼저 말했다.
“대표님은 오늘 온라인 회의가 있어서 당장은 못 와요.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저한테 말해줘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대표님이 누구예요? 저는 무슨 사모님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유지안이에요.”
정장 여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피식 비웃었다.
“사모님, 대표님도 바쁘고 저도 바빠요. 이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 없어요. 머리만 부딪혔는데 굳이 기억상실인 척할 필요 없지 않아요?”
그녀는 다시 비웃었다.
“인터넷 소설 너무 많이 보지 마요. 그런 밀당 수법은 대표님한테 안 통해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그런 소설 안 봐요. 그리고 당신 말하는 태도 영 불편하네요.”
정장 여자는 처음부터 나를 곱게 보지 않았다. 나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휴대폰을 툭 던지며 말했다.
“이게 사모님 휴대폰이에요. 일이 있으면 저한테 연락하면 돼요. 저는 이만 일 하러 돌아갈게요.”
말을 마치고는 허리를 흔들며 콧대를 세우고 나가려 했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머리를 풀어 헤친 여자가 급히 들어왔다.
“유지안, 너 괜찮아?”
상대를 보자 나는 놀라서 말했다.
“도주은, 너 왜 이렇게 변했어?”
눈앞의 여자는 나의 절친 중의 절친. 기저귀 차던 때부터 같이 진흙을 만졌고, 자라서는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거의 붙어 다녔다.
그런데 지금의 도주은은 내 기억 속의 도주은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다. 적갈색으로 염색한 머리, 굴곡을 드러내는 검은 타이트 원피스.
눈앞의 도주은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도주은은 내 모습을 보더니 먼저 눈이 빨개지더니 곧바로 말을 쏟아냈다.
“유지안 이 바보야. 연승훈 그 개쓰레기랑 헤어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끝까지 안 들었지. 이 꼴이 되어서 속이 시원했어? 죽네 사네 난리 치다가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나 진짜 놀라서 죽는 줄 알았다고, 흑흑흑...”
욕하다가 도주은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왜인지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도 가슴이 시큰해져서 나도 눈가가 붉어졌다.
그때 정장 여자가 다시 들어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저기, 도주은 씨, 여기는 병원이에요. 조용히 해줘요.”
도주은은 그 여자를 잘 아는 듯 손가락질하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전화해서 댁 대표님한테 말해요, 병원으로 오라고! 자기 아내가 다쳐서 입원했는데, 아직도 진슬기랑 자선 만찬에 갈 마음이 남아 있대요? 사람을 얕잡아도 정도가 있지! 진슬기 그 천한 여자는 거의 파산하던 댁 대표님을 깔보고 해외로 냅다 튄 거잖아요. 연승훈 회사는 누가 살렸는데요? 유씨 가문이에요! 지금 연승훈이 다시 일어서니까 진슬기가 또 들러붙어서 아양 떨고 있는 거예요. 은혜도 모르는 쓰레기, 부귀만 좇는 천한 여자. 쓰레기에 천한 여자, 운명의 한 쌍이네!”
도주은의 퍼붓는 호통에 정장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간호사가 도주은을 달래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제야 그 여자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병실이 조용해지자 도주은은 얼굴을 한 번 닦고 분개해 말했다.
“유지안, 내 말 좀 들어. 넌 연승훈을 7년이나 붙들고 있었고, 연승훈을 들볶은 지도 7년이야. 하지만 그 인간은 너를 사랑하지도 않고, 너랑 유씨 가문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아. 숲이 얼마나 큰데 왜 꼭 그 나무에서 목을 매려 해? 오늘은 뛰어내리겠다고, 내일은 손목 긋겠다고 난리 치니 연승훈은 이제 네 말을 믿지도 않아...”
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이를 갈듯 말했다.
“유지안, 너는 돈도 있고 외모도 되는데 왜 하필 연애밖에 모르는 머리를 달고 태어났어?”
나는 드디어 틈을 타 물었다.
“도주은, 연승훈이 누구야? 나 기억이 안 나.”
도주은은 잠깐 멈칫하더니 웃었다.
“연승훈의 비서는 벌써 갔어. 이제 연기 그만해. 네가 기억상실인 척하는 거 다 알아.”
나는 아직 부어 있는 뒤통수를 만지며 씁쓸하게 웃었다.
“도주은, 나 정말 기억을 잃었어. 네가 말하는 연승훈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도주은은 조용히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지 2분쯤 지나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 신이 너를 도왔네, 유지안! 네가 드디어 개자식 연승훈을 잊었구나!”
...
연이은 검사를 하고 나서, 의사는 간헐적 기억상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머리는 예민한 부위인데, 그때 나는 저택의 높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머리를 부딪칠 때 뇌의 어떤 기능이 망가졌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낯익은 계란형 얼굴, 살짝 들린 곧은 코,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입술. 분명히 내 얼굴인데, 익숙함 속에 깊은 낯섦이 섞여 있었다.
기억 속의 나는 생기가 넘쳤고, 매일 헤실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거울 속 나는 눈이 조금도 웃지 못했다. 오래 바라보니 깊은 원망까지 비치는 것 같았다.
정말 도주은이 말한 게 사실일까?
내가 연승훈이라는 사람을 7년이나 붙들고 있었다고?
게다가 결혼까지 했다고?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주은이 휴대폰 사진과 영상을 꺼내, 내가 정말 결혼했음을 철벽같은 사실로 보여줬다. 그것도 해안대학교의 차도남 연승훈과...
결혼식 사진과 영상 속, 잇몸 보일 만큼 활짝 웃는 나를 보며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주은이 중얼거렸다.
“너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연승훈한테 푹 빠져서 수업도 나가기 싫어했어. 매일 걔 기숙사 건물 아래에서 아침밥 들고 기다리다가 밥을 사 줬고, 걔가 농구를 하면 상자째 음료를 사서 팀원 전원한테 돌렸어. 생일에는 사람을 고용해 학교에 풍선이랑 현수막을 걸고 공개 고백을 했지. 연승훈이 아프면 너는 병실 바닥에서 24시간 쪽잠 자며 간병했고...”
나는 괴로워하며 말했다.
“그만...”
창피하네.
그런데 도주은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연승훈이 좋다고 학생회 사람들한테 뇌물도 줬어. 다른 사람 자리를 밀어내고 걔 인공지능 동아리에 들어가 잡일까지 했잖아. 근데 네 머리로 무슨 프로그래밍을 하겠어. 결국 그 동아리에서 공짜 일꾼이 됐지. 스무 살 생일에는 또다시 연승훈한테 고백했고...”
나는 귀를 막아버렸다.
도주은은 한숨을 쉬었다.
“너는 해안시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 광고비를 4000만 원을 들여 걸고, 24시간 내내 연승훈한테 너랑 결혼해 달라는 영상을 틀었어. 해안시 전체가 떠들썩했지.”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여 물었다.
“결국 어떻게 됐어?”
도주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연승훈이 네 청혼을 받아들였어.”
나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
“네 말대로 연씨 가문이 거의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그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니 나랑 결혼한 건 부득이해서였겠지.”
도주은은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듯 말했다.
“사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네 구애가 걔 마음을 움직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병실의 공기가 또다시 무거워졌다.
“진짜 창피하다....”
병색이 완연한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당당하고 자존심 강한 유씨 가문의 금지옥엽이, 결국 해안시의 웃음거리가 될 줄이야.”